가 족 생 활 편/나 의 글 방

(수필) - 아직도 그대

무철 양재완 2018. 2. 8. 12:45



 

 




아직도 그대

양 재 완

 

고등학교 동창 모임 중에 기우회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한 달에 한 번, 바둑을 두면서, 추억을 더듬고, 우정도 다지는 모임이다.


K는 기우회가 만들어진 몇 년 후에 가입한 친구인데, 바둑 급수가 높고 열정이 대단하여 금방 핵심멤버로 떠올랐다. 그가 회장이 되었을 때 내가 총무를 맡았다. 모임은 오후 2시에 시작하여 바둑을 두고 해가 서산을 기웃거릴 때 쯤 부근에서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간단히 하고 헤어지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K가 회장을 맡고 부터는 술자리를 한차례 더 마련하거나 가끔 노래방도 가게 되었다. 저녁 식사비는 회비로 충당한다지만, 나머지 경비는 본인이 알아서 한다며 친구들의 등을 떠민다. 속으론 좋아하는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친구들은 다들 미안해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기우회의 발전이라면 아까울 게 없다하며 혼자서 계산을 다 하곤 했다. K보다 재력이 월등한 친구도 있고, 대부분 밥술깨나 뜨는 친구들이라 경비를 각자 분담하여 내자고 하여도, 총무인 나에게 은근히 돈을 쥐여 주며 계산을 시키곤 했다. 기우회에 손이 큰 회장이 취임한 것이었다.


손이 크다는 것은 헤프고 알뜰하지 못하다는 비난의 뜻과, 인심이 후하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뜻이 있다. K는 후자인 마음과 손이 큰 친구였다. 덕분에 기우회는 많이 발전하였다. 회원 수가 늘어난 건 물론이고, 실력도 그에 따라 향상되었다. 무엇보다 회원 간의 친목이 돈독해졌다. 어느 날 K는 우리 모임에 선후배간의 바둑교류를 위해 대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본인이 자금은 부담 하겠다고 했다. 친목 바둑대회는 선후배지간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모임도 더욱 화기애애하게 운영되었다. K는 자신이 조금 희생하고 베풂으로 전 회원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자신 또한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고 했다. 나의 옆구리를 슬쩍 칠 때는 K가 함박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다.


그와 손발을 맞춰 가며 기우회를 어느 정도 재미있는 모임으로 만들어 가던 어느 새벽. 휴대폰을 울린 문자 한 통이 나의 뇌리를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문자판에는 K의 이름이 보이고 본인 별세라 적혀 있었다. 친구의 딸이 보낸 것으로 밤사이 갑자기 운명 하셨다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돌이켜보며, 60세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라 했다. 친구는 나이가 60대 중반에다 기우회에서 자신의 정열을 한껏 쏟아 부운만큼 건강해 보였기에 이별하리란 생각은 전혀 못 했던 일이었다. 평소에 몸이 불편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고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며 지내온 터였다. 다만 가벼운 자동차 접촉사고로 말미암아 근래 신경 쓸 일이 있다 했지만, 워낙 성격이 부드러워 잘 해결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옆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가 밤새 안녕하듯이 떠나니 그 허탈함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회원들과 함께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치받아 올라왔다. 빈소의 영정사진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홀로 서산을 기웃거리며 먼저 넘어간 친구를 가슴에 품고 온 그 밤. 치솟는 감정을 기우회 카페로 하염없이 쏟아부었다.

 

친구여 / 누가 그리 급히 부르든가 / 일주일 전 우리 서로 만났을 땐 / 간다는 말 없었잖아 ( - ) / 친구여 /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 문자속의 본인별세가 자네라니 / 이게 말이 되는 거니 ( - ) / 친구여 / 우리 어디 가면 간다고 / 얘기를 해 주고 가는 게 / 진정한 친구 아닌가 / 자네 혼자 말없이 가 버리면 / 나머지 우린 무슨 재미로 / 모이고 떠들 수 있겠는가 ( - ) / 친구여 / 여기 보다 더 나은 세상이 / 자네를 불렀다면 / 부디 즐기며 지내게 ( - ) / 그 곳이 마음에 들거든 / 우리도 불러 주렴 / 즐기던 바둑이나 실컷 두게 ( - ) / 친구여 / 우리가 너를 만나는 그날 까지는 / 항상 너를 잊지 못 할 거야 / 이곳의 친구들 잊지 말고 / 편히 기다리게 / 우리 서로 언젠가 만날 그 날 까지

 

친구 이름을 자꾸 자꾸 부르며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먹먹하던 가슴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지만, 그 밤은 그가 즐기던 술과 함께 지새웠다.

기우회는 계속하고 있다.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서는 K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생활의 즐거움을 자신의 희생과 베풂 속에서 찾은 그는, 우리가 바둑 두는 날에는 훈수를 두고 싶어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