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해 뜨는 날
양 재 완
쨍하고 해 뜨는 날은 여행가기로 마음먹는 날이다. 대부분 여행지는 기차나 버스시간표에 맞춰 혼자 배낭 꾸려서 다니는데, 당일여행이 어렵거나 교통편이 복잡한 코스는 여행사나 산악회를 이용한다.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산악회의 일정표에 따라 다녀온 여행지이다. 이 길은 4개 구간으로 25km를 걷는 길이나, 이날은 경관이 뛰어난 두 구간(13km)만 걸었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출발하여, 선바우길을 거쳐, 구룡소까지 해변을 따라 걷는데, 길이 없던 곳에 데크로드를 만들고, 자갈길엔 큰 돌을 이어놓아 걷기가 편하다. 또한, 자연적인 형상이 많아 보는 재미와 광활한 동해의 장쾌한 파도소리를 듣는 재미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바닷길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의 주인공인 연오랑세오녀 부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테마공원을 둘러보고 출발하는데, 시작부터 파란 하늘과 더 파란 바다가 도시에서 가져온 마음의 찌꺼기들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매서운 날씨가 이어진 요즘, 귀하게 얻은 포근한 날씨다. 입암이란 마을 이름이 된 선바우부터 시작되는 데크로드에는 각각의 형상으로 빚어진 자연석들이 박물관의 조각품처럼 줄지어 있는데, 남근바위, 폭포바위, 여왕바위, 킹콩바위, 소원바위가 이름 그대로의 모양으로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대한 흰 바위로 형성된 ‘힌디기’를 지나면 용왕이 선녀와 놀았다는 하선대가 나오며 이어 먹바우(검둥바위), 비문바위, 물개바위, 미인바위, 신랑각시바위, 군상바위와 같이 이름을 닮은 자연의 형상들을 만나게 된다. 흥환해수욕장을 지나면, 잠시 자동찻길을 걷다가 다시 해변을 만난다. 갯바위에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발밑의 자갈 밟는 소리는 악보 없는 음악이며, 넘실대는 파도를 보노라면, 하선대의 선녀가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유혹하는 것 같다. 마음 약한 나그네가 이런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갈매기와 벗하는 음전한 갯바위 옆 자갈밭에 자리를 잡고, 흘러가는 어선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파도와 더불어 오찬을 즐긴다. 때로는 웅장하며 때로는 감미로운 파도소리와, 캔 맥주의 시원한 거품은 나에게 또 다른 여행길을 찾게 만든다. 갯벌다운 갯벌이 없는 동해안에는 수만 가지 모양의 갯바위들이 마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다. 부서지는 파도의 은빛포말과 갯바위는 스쳐 지나가는 한 폭의 풍경화다. 갯바위는 동해에 터를 내린 생명에게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어 준다. 따개비를 비롯한 자신이 품고 있는 어린 생명을 위하여, 몰아치는 파도에 맞서지도 않고 제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다. 풍파에 역행하지 않는 삶의 유연함과 모성애를 느끼게 한다.
바다가 주는 넉넉한 마음을 가슴 가득 담고 걷는 해안둘레길은, 다시 장군바위를 지나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소를 지나서야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여행에는 자유가 주는 즐거움과, 자연의 신비함과, 삶의 교훈이 함께 한다. 오늘도 기상청 일기예보에서 쨍하고 해 뜰 날을 찾고, 여행사의 일정표를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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