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의 고요가 그리운 사람은 ― 동학산 경흥사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기사입력 2020-10-14 오후 5:27:06
▲ 동학산 경흥사
절집은 적요하다. 스님도 보살도 보이지 않고 햇살과 바람만이 절집을 지킨다. 경흥사는 언제 가도 고요하다. 문명의 현란함과 세상의 번잡함이 싫을 때 자주 들리는 절집이다. 경산시내에서 차로 2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이런 고찰이 있는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남천면 산전리 모골은 골이 깊다. 동학산에서 흘러내리는 수량이 풍부한 물이 사시사철 계곡을 적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골에는 굿당이 있었다. 전란이 발생하거나 시대가 어지러울 때 민초들은 자연에서 상처를 위로받고 삶의 희망을 얻으려했을 것이다. 한때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 평상에 앉아 복날이면 백숙을 먹던 골짜기였다.
경산에서 청도로 가는 옛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남천면 대명리 제2수송교육단 정문을 지나면 나무색 경흥사 안내판이 보인다. 산전리 마을로 우회전을 하여 다리를 건너 남천강 강둑을 따라 계곡 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 형상이라 이름 붙여진 동학산 기슭, 부리 부분에 경흥사가 있다. 절집은 가파른 병풍산을 마주하고 자리 잡았다. 창건 시기는 신라 무열왕 때 혜공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990년 대웅전 불상의 복장(服藏) 유물에서 사적기가 나왔다. 사적기에 따르면 한창 때는 경흥사에 딸린 부속암자가 여럿 있었고, 임진왜란 전에는 수십 명의 학승이 공부하던 큰 가람이었다. 현재 경흥사는 1980년대 중반 경산 출신의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경산시의 도움과 신도들의 발원으로 중창했다. 아무렴 어떠랴. 삶에 지친 이들이 절에 와서 위안 받고 쉴 수 있다면 무엇을 바라랴.
당간지주는 없지만, 절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호젓한 숲길이다. 도심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맑아진다. 동학산 골짜기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이 물은 남천으로 흘러간다. 산전리는 땅 속에 맥반석이라는 보물이 묻힌 곳이다. 보리가 박힌 듯 흰 문양이 있어 맥반석이라 부르는 돌은 귀중한 광물자산이다. 맥반석은 중금속을 분해하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다. 수질정화 작용도 하며 원적외선도 방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화병이나 어항에 맥반석을 넣어두면 꽃이 잘 시들지 않고 이끼도 생기지 않는다. 신비의 돌이라 칭하는 맥반석은 도자 재료로, 화장품 원료로 수출도 한다. 경흥사 주변을 자세히 살피면 맥반석이 눈에 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는 산이 가파르다. 이끼가 잔뜩 낀 돌계단과 고목이 절집의 역사를 증언한다. 한창 절이 번창할 때는 쌀 씻은 물이 남천강까지 흘러 강물이 쌀뜨물로 부옇게 흐렸다는 전설도 전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범종루가 있고 오른쪽에는 공덕비가 몇 기 서 있다. 좁은 터 탓에 가람 배치가 수평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요사채가 좌우로 자리한다. 자갈을 깐 절 마당이 꽤 넓다. 키 큰 은행나무 아래 의자와 소독제가 놓여 있다. 방문객을 위한 절집의 배려가 느껴진다. 내게 경흥사는 여름날 피서지였다. 한여름 태양의 열기가 달아오르면 돗자리와 김밥 몇 줄 사들고 친구와 경흥사로 갔다. 경흥사 근처 짙은 그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수다를 떨면서 피서를 했었다.
▲ 명부전 수미단
경흥사에는 두 가지 보물이 있다.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과 명부전 수미단이다. 몇 차례 중창불사를 거쳐 오늘날 경흥사의 모습이 존재하나, 이 두 문화재는 옛것 그대로다. 수미단은 상상의 산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경외심을 높이기 위한 장식물이다. 명부전 수미단은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색상은 낡았으나 조각상은 선명하다, 전면에는 게와 용, 기린, 물고기, 개구리, 도롱뇽, 꽃 등 상상과 실제의 동식물이 새겨져 있다. 측면에는 연과 모란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양면 투각기법으로 꽤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검은색의 게가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있다. 본래 수미단은 여러 단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예술적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이 뜯어가 버려 지금은 한 단만 남았다.
▲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대웅전 목조삼존불상은 은행목으로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 이 삼존불상은 1637년 정축년에 주지인 영규대사가 3년간이나 전국을 돌면서 탁발을 하여 이 불상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주불이며, 화려한 보관을 쓴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보좌한다. 임진왜란은 사찰건물과 미술품을 재로 만들었다. 사찰중건은 전쟁으로 피폐한 민심을 수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급선무였으리라.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대성당을 장식하는 화려한 미술품과 조각상에 감탄한다. 우리도 낯선 시선으로 불교 미술을 보면 소중하고 아름답다. 경흥사 수미단, 백흥암 수미단, 통도사 수미단 조각은 언제 보아도 감탄스럽다.
대웅전 옆 공터에 앉아 토기조각을 찾아보았다. 청자와 백자 조각 몇 개를 주웠다. 오래된 사찰에 가면 보물찾기하듯 토기조각을 줍는다. 깨진 사금파리 조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의 자취를 더듬는다. 청자와 분청사기 조각이다. 인간은 소멸하지만, 인간이 남긴 도자기와 조각상, 건축물은 살아남는다. 이런 문화유산을 보면서 역사를 실감하고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대웅전 뒤 산령각 옆 언덕에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수줍게 피어있다.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요사채 마루에 앉았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새소리와 물소리만 들릴 뿐,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오후 세 시, 초가을의 해가 설핏 기운다. 엷은 햇살이 비추는 툇마루에 앉아있노라니 마음도 머리도 고요하다. 절간의 고요가 그리운 사람은 경흥사로 가면 되리라.
▲ 분청사기 가마터
경흥사에서 내려오다가 오른쪽 모골 방향으로 차를 돌린다. 백여 미터 올라가면 오른쪽 산자락에 ‘분청사기 가마터’가 나온다. 오래 전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깨진 사발조각이 흙속에 박혀있었다. 주로 회청색의 청자와 귀얄무늬 인화문양의 분청사기 조각들이었다. 1982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예전 모습은 볼 수 없다. 가마는 6기로 100미터 가량의 등요인데,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그릇을 굽던 도요지였다. 그릇 굽에 새겨진 ‘경산장흥고(慶山長興庫)’, ‘경산맥석(慶山脈石)’, ‘부(夫)’ 등의 글자로 보아 관요와 민요의 역할을 겸한 가마터였다. 특히 산전리에 흔한 맥반석으로 구운 그릇은 맥반석의 효능으로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분청사기상감초화문병’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깊은 산골에서 그릇을 굽던 도공들도 심신이 지치면 가까운 경흥사에 들러 부처님께 소원을 빌고 마음을 위로 받지 않았을까.
가을이 깊어지면 경흥사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 것이다.
<글 / 이운경(이경희)>
<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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