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동네, 구룡마을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기사입력 2020-11-14 오전 10:35:16
▲ 하늘 아래 첫 동네....구룡마을
1. 하늘 아래 첫 동네
구룡마을 가는 길에 만추의 풍경이 펼쳐진다. 진갈색의 참나무 숲과 붉은 홍단풍이 어우러진 골짜기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풍경은 첼로와 바이올린의 화음처럼 화려하고도 그윽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귀방우골 마을을 지나 구룡산을 향해 꽤 넓은 분지가 나타난다. 그곳이 경산의 오지마을이자 천주교 성지인 구룡마을이다.
구룡산은 이름 그대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산이다. 해발 675미터, 차에서 내리니 사방천지가 산이다. 가까운 산은 붉은 물감을 쏟아부은 듯 단풍이 익어가고, 멀리 보이는 산자락은 회청색으로 물결친다. 동해 용왕의 셋째 딸이 구룡산에 터를 잡아 천우를 다스렸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심한 가뭄이 들면 구룡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렸다고 하니 이름값을 한 산이다.
구룡마을은 구룡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경산 매남 구룡마을, 영천 수암마을, 청도 구룡마을(비석리) 등이다. 세 시·군의 경계지역에 마을이 자리한다. 한여름에도 기온이 서늘하여 고랭지 채소를 재배할 만큼 산중 마을이다. 지금은 현대식 펜션과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코로나 시대, 구룡마을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일터, 문명의 그림자가 스며들지 않은 순수 자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도 운문면을 향해 산길을 달리다가 팔 부 능선쯤 다다르면 구룡마을 표지가 보인다. 좌회전하면 마을 진입로가 나오는데 벼랑 끝 외길이라 진땀이 난다. 고라니나 꿩 새끼도 만난다. 언덕 위 하늘색 지붕을 인 닭백숙집이 보이면 구룡마을이다. 부부가 닭도 키우고 산나물도 뜯고 된장도 담근다. 산나물과 된장이 맛있는 집이다. 그 집을 돌아가면 오른쪽에 십자가와 한옥으로 지은 구룡성당이 보인다. 벚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거로 보아 봄날이면 벚꽃이 환하게 피어 꽃등을 켜겠다.
구룡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은 세 갈래로 형성되었다. 마을 한복판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묵정밭과 무덤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 선대들의 안식처이다. 고갯마루쯤에 이정표와 대나무 숲이 있다. 운문면 정상리와 발백산을 가리키는 이정표 앞 대나무 숲이 있는 그 자리에 주막이 있었단다. 대나무숲은 북풍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한 흔적이 보인다. 초승달 모양의 숲을 끼고 남쪽에 주막이 있었던 듯싶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햇볕이 따사롭게 비친다. 보부상들이 청도 동곡장과 영천장을 오가며 넘던 고갯길이다. 산중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에 피로를 달래고 다시 고된 발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작은 저수지가 보인다. 천수답을 일구었으니 논에 물을 댈 저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저수지에 수초가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저수지 아래 논이었을 자리에는 잡풀만 무성하게 자란다. 옛 구룡분교 터를 찾아간다. 산길을 내려가니 옴폭한 분지가 나타나고, 햇볕이 따사롭게 마을을 비춘다. 매남4리 경산 구룡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정자에 올라서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멋지게 자란 소나무 몇 그루와 배경으로 자리한 산맥이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에도 현대식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골목과 옛집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돌담과 쓰러져가는 흙집이 몇 채 보인다. 주인 떠난 집터는 텃밭으로 변해 가을배추가 푸릇하게 자라고 있었다. 어느 집 마당 귀퉁이의 모과나무에는 주먹 만한 모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학교는 마을 안쪽에 있는데, 작은 교적비가 역사를 증언한다. 1957년 10월에 개교하여 1992년 3월에 폐교했는데, 졸업생 90여 명을 배출했다. 지금은 학교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공터 옆 서리 맞은 호박잎이 애처롭다.
구룡마을은 중앙의 구룡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자연부락을 형성했다. 농사를 짓던 원주민은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마을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 무덤이 많이 보인다. 지금은 원주민보다 귀향한 자식 세대나 외지인이 더 많다. 애초에 구룡마을은 천주교 신자들의 피신처였으나, 지금은 삶에 지친 이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힐링 마을이다. 구룡마을의 탄생 동기나 존재 이유가 현재까지 이어지니 앞으로도 이 마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 천주교 성지, 구룡성당
천주교는 조선 백성의 마음으로 먹물처럼 스며든다. 지배층의 부패와 지주의 수탈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에게 천주교는 빛으로 다가왔다. 왕조의 모순과 제도의 쇠퇴, 인간의 비틀림이 극으로 치달리던 시대,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은 우매한 이들의 눈을 뜨게 했으리라. 그러나 수구 세력의 천주교 탄압은 순교의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신자들은 관원의 눈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등지에서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추적의 발길은 집요했다. 다시 십자가와 성모상을 보따리에 쌌다. 더 깊은 산골로 숨어든 곳이 구룡산 자락이었다.
처음에는 청송에서 피신온 신자들이 구룡산 아래 용성면 매남리 쪽에 둥지를 틀었다. 무슨 연원인지는 모르나 구룡산 정상으로 이전하여 성당을 짓고 교우촌을 이룬다. 이전의 경험 탓인지 배교자가 한 사람도 없이 신앙을 지키면서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이는 인근 마을 주민들과 관계를 원만히 하였고, 천주교라는 이질적 신앙을 토착화하였기 때문이리라. 이런 연원으로 구룡마을은 순교자 없이 수십 년 동안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성당 건립사를 보면 1921년 12월 20일 성당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의 격변기에도 성지로서 살아남은 곳이다. 1921년 안세화(드망즈) 주교의 사목 방문을 기념하여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고, 1933년 구룡성당을 준공한다. 1995년에는 허물어진 공소를 복원하고, 피정의 집도 세운다. 2018년 대구교구에서 신앙유적지 복원계획에 따라 한옥성당을 건립하고, 구룡산에 십자가의 길도 만든다. 시간이 허락하면 마을도 한 바퀴 돌아보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삶을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은 산 정상의 갈대밭을 개간하여 쌀농사를 지었다. 옹기를 구워 인근 장에 내다 팔기도 했고, 짚신을 만들어 오일장에 가져가 팔아 생필품을 사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고 종교 탄압이 없어지자 신자들은 자녀들을 대처로 내보낸다. 나는 구룡마을에 갈 때마다 이 산중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자못 궁금하다. 마을을 둘러보면 물버드나무가 자라는 습지가 많고, 완만한 구릉지라서 햇볕이 잘 든다. 산 아래보다 농사짓고 살기에는 구룡마을이 더 좋은 환경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일 한낮 성당은 고요하다. 늦가을의 햇살과 바람이 신앙을 목숨처럼 지키려 이 골짜기로 피신한 선인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있었다.
3. 구룡마을 사람들
구룡마을은 인물이 많다. 첩첩산중에 살면서 산 너머 세계를 향한 동경과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겹쳐서인지, 구룡산 전설처럼 용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대처로 나가 성공한 이들이 많다. 신앙의 성지답게 가톨릭 신부가 일곱이나 되고, 박사 교수 기업인이 수두룩하다. 하양 무학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이임춘 신부님도 구룡마을 출신이다. 어린 시절 이 신부님을 가까이서 자주 뵈었는데, 근엄하셨지만 인자한 할아버지 신부님으로 남아 있다.
▲ 구룡분교 교적비
구룡분교 터에 가 보았다. 이 작은 터에 학교가 있었나 싶다. 대학 시절 활동한 동아리 ‘경산독서회’는 여름방학이면 구룡마을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대학생들은 어른들의 농사일도 돕고, 아이들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내가 들은 구룡마을은 지리산 청학동처럼 비현실적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지금 구룡마을에는 산 좋고 공기가 좋아 들어온 이들이 여럿 있다. 1세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마을 개척자였다면, 2세대는 6,70년대 정부의 화전 개간 정책에 따라 이주해온 주민들이다. 그들은 신앙과는 무관하게 마을에 자리 잡아 농사도 짓고 산나물이나 약초도 캐고, 누에도 길렀다. 마을에 뽕나무가 잘 자라서 누에치기를 많이 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큰 뽕나무가 보인다. 3세대는 대처로 떠났던 마을 사람들이 귀향했거나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온 이들이다. 최근 구룡마을은 다시 현대식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구룡 비석리 출신인 최병석 씨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결혼 후 구룡으로 와서 오 남매를 낳고 일가를 이룬다. 오년 전까지 구룡마을에 사시다가 지금은 경산 시내 아파트로 이주했다. 부모님은 숟가락과 솥단지만 들고 구룡마을에 들어왔다. 열심히 농사짓고 누에도 쳐서 땅도 사고 자식들 공부도 시켰다. 최병석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먼저 나간 형들을 따라 대구 시내로 전학한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용성에서 구룡마을까지 산길을 걸으면 짐승이라도 나올까 오금이 저렸다. 사업체를 운영하며 자수성가한 그는 고향 집터에 새집을 지었다. 마당에는 오래된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다. 살구꽃이 피면 그 집에서 문우들과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한 달에 두세 번씩 주말에 시골집에 들르는데 언젠가 귀향할 꿈을 가지고 있다.
옛 구룡분교 터를 둘러보는데, 하늘색 대문이 열려있었다. 흙집 처마 아래 정갈하게 손질한 무청 시래기가 널려있었다. 마당에 할머니가 보이 길래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올해 여든둘 김귀분 할머니다. 낯선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래채는 짚을 썩은 흙과 나무로만 지은 전통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이 집을 지은 할아버지는 오 년 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할머니만 집을 지키고 계셨다.
며칠 후 다시 구룡마을 김귀분 할머니를 찾아갔다. 스무 살에 영천 복안에서 그 마을로 시집온 시누이의 중매로 김종해 할아버지와 혼인을 했다. 신랑이 신부를 위해 장롱과 앉은뱅이책상을 마련해두었다. 그때 장만한 책상과 장롱은 지금도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산길을 걸어서 시집오던 날, 온다던 신부용 가마도 안 오고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났다. 정상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눈물을 훔치니까 친정아버지가 솔밭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아버지가 솔밭에서 도포끈을 잃어버려 황망했던 이야기를 두고두고 했단다.
▲ 구룡마을 2세대 김귀분 할머니(82세)
부부는 큰집에서 몇 년 살다가 학교 앞에 집을 지어 분가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잠은 숙직실에서 자고 밥을 대놓고 먹었다. 찬거리를 사러 영천 대창장까지 걸어가 장을 봐서 머리에 이고 왔다. 오 남매를 낳아 공부시키느라 할머니는 허리가 휘었다. 중학생만 되면 용성면 내 친척 집에 아이들을 내보내 하숙시켰다. 인생을 돌아보면 힘은 들었으나 자식들 공부시킬 때가 가장 좋은 봄날이었단다. 한때는 대처로 나갈 생각도 했으나 그냥 구룡마을에 눌러앉았다. 이 마을에 시집와서 예순두 해나 살다 보니 구룡마을이 편하고 좋단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몇 날 며칠 눈 치우느라 고생을 했다. 겨울을 나려면 미리 약도 사다 놓고 생필품도 사놓아야 했다. 구룡마을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일은 교통이다. 지금도 경산 시내를 나가려면 택시를 부른다. 할머니는 내 질문도 잘 이해하시고 이야기도 논리적으로 잘하셨다. 구룡마을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머리도 총명하고 사리에도 밝은 분이셨다. 김귀분 할머니가 오래 건강하게 마을을 지키고, 우리에게 구룡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소망한다.
오지 구룡마을은 생태주의의 물결을 타고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경산 쪽 도로가 확장된다고 하니 구룡마을 가는 길이 수월해질 전망이다. 나는 구룡마을이 앞으로도 고요하고 깨끗한 오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이 싫을 때 훌쩍 찾아가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마을로 남아있으면 좋겠다. 오후 네 시가 가까워지자 산 그림자가 벌써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글 / 이운경(이경희)>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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