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 등 산 편/경산곡곡스토리텔링

경산곡곡 스토리텔링에 사진을 싣다 - 4 (성암산) (경산인터넷뉴스)

무철 양재완 2020. 9. 28. 10:16

 

경산의 진산(鎭山), 성암산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기사입력 2020-09-28 오전 8:59:01

 

탐방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다

▲ 성암산 탐방로

 

오랜만에 찾은 성암산은 여전히 나를 반겨준다. 산을 배경으로 아래쪽 도로변에는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다. 초입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오르니 대구 부산 간 고속도로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문득 지난날 고속도로 구간이 이곳을 지난다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경산시민들이 반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경산 사람들은 예로부터 성암산을 지역민을 지켜주는 진산(鎭山)으로 여겨왔다. 대구시와 경계를 이루며 도시의 서쪽을 아늑하게 에워싸고 있다. 그리 높지 않아 1~2시간이면 충분히 정상에 닿을 수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이어진다.

▲ 경산시 현충공원

 

옛 기억을 더듬으며 충혼탑을 찾으니 낯익은 듯 낯설다. '경산시 현충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6366일 현충탑을 건립하였다가 시민들의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9년 새로이 공원을 조성하였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공원에는 충혼탑뿐만아니라 6·25전적기념탑과 월남참전기념탑, 무공수훈자 공적비도 세워져 있고, 참전용사들과 수훈자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탐방로로 길을 잡았다. 전에 없던 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 옆을 살펴보니 흙길도 있어 계단이 아닌 흙길을 택했다. 철봉이나 윗몸일으키기, 허리운동을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기구가 설치된 체육시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길이 6체육시설까지 이어진다. 나는 점점 나이 들어가는데 산은 도리어 젊어지는 것 같다.

 

 

6체육시설은 정상에 오르는 중간지점쯤 되는 곳으로 쉼터 정자도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600m쯤 가파른 길이 정상에 오르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뒤쪽 응달진 곳으로 돌아 보드라운 흙으로 잘 다져진 평탄한 길을 택했다.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양말까지 벗었다. 맨발이 느끼는 흙의 감촉은 마치 어린아이 손길같이 발바닥을 기분 좋게 간질인다. 곳곳에 물봉선이 피어있어 눈길을 끈다.

▲ 성암산 정상 상암봉

 

해발 469m, 정상에 오르니 성암산 표지석과 정자가 있다. 경산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전혀 없어 가슴까지 탁 트인다.

 

 

범굴과 성암산 사찰

▲ 수정사 공덕비

 

다음날엔 태풍이 올 거란 기상 예보를 듣고도 숙제하듯 수정사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혼자 가기 한적한 길이라 어릴 적 친구랑 동행했다. 수정사 대웅전과 산령각 앞에 공덕비가 있다. 비석에는 ‘1914년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태어나 6·25동란 이후 목숨을 걸고 월남한 이동실(의리심) 보살이 성암산 기슭 범굴에서 수행 정진한 끝에 1952년 수정사를 창건했다고 적혀 있다.

 

공덕비와 대웅전 사이로 난 돌길을 걸어 성암사 쪽으로 향했다. 비를 머금은 대기는 무겁게 내려앉았고, 길 양쪽으로 돌탑이 줄을 지어 있다. 이 길을 오고간 수 많은 사람의 소원들이 모여 돌탑으로 서 있는 듯하다. 나도 돌탑 위에 소원 하나를 얹어 놓는다. 울퉁불퉁 불편해도 운치가 있다.

▲ 성암산 성암사

 

30분쯤 올라가니 소박한 건물이 보이고, 소나무 두 그루 사이 걸쳐놓은 나무판에 기도 청량도량 聖岩山聖岩寺라고 적혀 있다. 소나무가 일주문인듯하다. 대웅전이 여느 사찰의 규모보다 작다. 삼성각 왼쪽 바위 절벽 아래 용왕당이 있고, 왼쪽으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무심코 오르는데 성암사 쪽에서 누가 다른 길로 가라고 큰소리로 알려준다. 우리가 범굴 이야기를 하며 가는 것을 들었나 보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운무에 쌓인 성암사가 한 폭의 수묵화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범굴이었다.

▲ 범굴

 

옛 기억을 더듬어 범굴을 찾았으나 쉽게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갖는 순간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범굴 애래 비교적 평평한 땅과 우물도 그대로 남아 있고,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석축들도 보인다. 이윽고 범굴에 도착하니 어느 사이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저 바위굴 속에 들어가면 비를 충분히 피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들어가지 말라고 펜스를 쳐두었다. 앞에는 안내판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범굴이 경산 지역의 문화유적지라 훼손하지 말라는 안내이고, 다른 하나는 범굴에 관한 유래를 적어두었다. 범굴에 얽힌 이야기는 미리 읽었던 터다.

 

조선 시대에 한 노승이 성암산 정상에 암자를 세우고 수도 생활을 했다. 스님에게는 동자승도 한 명 있었다. 그런데 눈보라가 치는 어느 겨울밤 마을에 양식을 구하러 간 스님이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동자승은 혼자서 걱정하며 기다렸다. 스님은 돌아오는 길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다. 잠깐 놀랐으나 호랑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호통쳤다. 하지만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아 자세히 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녀자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목에 비녀가 걸려 고통을 겪고 있었다. 스님은 호랑이를 크게 꾸짖은 후 비녀를 뽑아 주었고 호랑이는 곧 잘못을 뉘우쳤다. 스님은 호랑이를 데려와 동자승과 함께 생활하도록 했다. 호랑이는 범굴에 살면서 동자승과 나란히 스님의 교육을 받았다. 뒷날 동자승은 성암대사가 되었고, 호랑이는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는 성암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 성암산 전경

 

본래 옥산이었던 이 산이 성암산(聖巖山)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유래도 있다. 임진왜란 때 산 아래 옥곡동에 있던 향교의 노비 강개명이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성현들의 위패를 지게에 지고 옥산 정상부 바로 아래 가파른 절벽까지 올라 범굴에 무사히 보존시킨 일화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산 유림들은 성인의 위패를 보호해 주었다하여 이 산에 성인 성()자를 붙여 성암산이라 했다. 또 전쟁이 끝난 뒤 강개명은 공로를 인정받아 천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고 전한다.

 

범굴은 정상 바로 아래 암벽에 뚫려 있다. 범굴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5분가량 오르면 정상에 다다른다. 우산을 쓰고 오르기엔 위험할 것 같아 내려가기로 했다. 가다 보니 성암사 삼성각 아래 우산을 쓴 중년의 남성이 서 있다. 그는 성암산을 매일 오른다고 했다. 성암사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어보니 우리를 사찰로 안내했다. 스님은 출타 중이고 총무라고 자기를 소개한 분이 차 한잔을 내주며 절이 지어진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성암산 아래 살던 반씨 성의 젊은 여인이 중병에 걸리자 1951년 이곳에 절을 지어 불사하고, 지극한 정성을 드린 후 장수했다고 한다. 오르면서 마주한 수정사도 6·25 전후에 지어졌다고 하니 성암산에 있는 사찰들이 지어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 '성암산 예찬' 시 두 편

▲ 성암산에서 내려다본 경산시내

 

성암산은 조선 시대에도 지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약수사 입구 초계정씨, 정동민(鄭東珉) 묘소 앞에 있는 시비에는 '성암산 사시(四時)''덕등절구(德嶝絶句)' 두 편의 시가 적혀 있다. 작가는 무덤 속 주인의 차남인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18771952)이다. 경술국치 이후 경산시 옥곡동 성암산 자락 우경재(寓敬齋)에 은거했던 그는 <탁와집> 등 많은 저서를 남긴 유학자다.

 

봄 꿩은 다퉈 오르고 햇빛은 언덕을 태우네(春雉競升日煮岡)

여름 소는 풀밭에서 돌아갈 일을 잊었구나(夏牛忘返草平場)

가을 바위 달빛 아래 서리 내려 더욱 희고(秋巖月色霜加皓)

겨울 골짝 솔잎은 눈을 이고 다시 푸르네(冬壑松髥雪更蒼)

 

성암산 사시를 읽으면 성암산 둘레를 한번 걸어보고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이곳저곳 다녀보고 싶어진다. 산의 형상을 설명하지 않지만, 시인은 성암산이 머금은 정취를 사계절에 걸쳐 조곤조곤 들려준다.

 

성암산에는 덕이 있다하여(聖巖山有德)

덕등이라 부르니 헛된 이름이 아니로다(德嶝非虛名)

숲은 깊어도 사나운 짐승이 없으니(林深無猛獸)

나무하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서 다니네(樵竪任孤行)

 

이 시에서는 성암산에 숲은 깊어도 맹수는 없다고 하며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서 다닌다고 읊었다. 범굴에 살던 호랑이는 이미 스님의 교육을 받고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는 산신령이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두 편 외에 '성암칠절(七絶)'도 지어 성암산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한 걸 보면 그도 성암산을 무척 좋아했던 사람 같다.

 

 

산길을 걸으며



 

성암산 아랫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매일 산에 올랐다. 그즈음 우연히 가게 된 어느 지역의 축제장에서 열린 백일장의 글제가 이기에 성암산 등산길 이야기를 써냈다가 수상한 적이 있다. 그때 쓴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곳이다. 출발점이 같은데, 가다가 갈라져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출발부터 아예 다른 곳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은 체육시설이 있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뒤쪽 응달진 곳으로 돌아 평탄한 길을 좋아한다. 지름길로 갈 때보다 두세 배 더 많이 걸어야 하지만 산책하듯 걸을 수 있어 좋다. 봄엔 양달에서 핀 꽃들이 다 진 후에도 늦게 핀 참꽃이 남아 오래도록 볼 수 있어 좋다. 여름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나무 그늘이 우거져 좋고, 활엽수가 많아 가을엔 낙엽 밟는 소리를 음미하며 걸을 수 있다. 겨울엔 쌓인 눈을 오래도록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성암초등학교 앞으로 오르는 길도 비교적 완만한 길이다. 대구 쪽에서는 욱수골과 덕원고등학교 뒤로 오르는 길이 있다. 가파르기와 완만하기가 다른 길이 또 있다.

 

나는 그때그때 기분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따져보고 갈 길을 정한다. 완만하고 편안한 길일수록 더 오래도록 걸어야 한다. 짧은 시간에 다녀와야 한다면 가파르고 험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힘이 들지만,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이가 같은 삼각형에서 기울기가 낮을수록 빗변의 길이가 길어진다는 원리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생활에서 경험하며 보고 느끼는 일들이다.



 

살아가는 모습도 등산하는 것과 많이 닮아있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면 목표는 멀어질 것이다. 목표를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는 힘들고 험난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가장 단거리로 정상에 오르려면 튼실한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많은 것을 놓칠 것이다. 여유롭게 걸어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들풀과 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풀벌레 소리도,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동행하는 친구도 놓칠 수 있을 것이다.

 

가파른 지름길보다 평탄한 흙길을 좋아하듯 나는 살아가면서 여유를 가지고 싶다. 목표를 좀 넉넉한 곳에 두고 산책하듯 천천히 걷고 싶다. 가다가 그늘 좋은 곳이 있으면 잠시 쉬어 가고 싶다. 약수터에서 한 모금 물로 목도 축여 가며 길동무와 정담도 나눌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과정이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등산도 정상에 오르는 목적만이 아니라 가는 길을 즐기듯 삶도 순간순간의 여정을 즐기며 살고 싶다.

 

지금도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글 / 천윤자 수필가>
                                                                                                                      < 사진/무철 양재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