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강은 흐른다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기사입력 2020-09-15 오전 10:18:54
▲ 남천강변
1. 경산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남천강
강둑길을 걷는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자갈의 감촉과 소리가 정겹다. 강에 대한 동경은 무의식에 각인된 결핍이었다. 강변으로 거처를 옮긴 나는 날마다 강변으로 나갔다. 봄이 되자 남천 강변의 풍경이 날마다 달라졌다. 흙이 있는 곳에는 틈새에도 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개나리를 시작으로 민들레, 꽃다지, 벚꽃까지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의 향연 앞에 시민들은 강변으로 몰려나온다. 옥곡동 아파트 단지 옆 강변도로와 경산여성회관 앞 강둑에는 4월 초가 되면 벚꽃길이 펼쳐진다. 연분홍 벚꽃이 꽃구름처럼 피어오르면 남천강에도 피라미들이 떼를 지어 군무를 춘다. 벚꽃잎이 난분분 흩날리는 봄날, 남천 강변 벚나무 아래서 자전거를 세우고 시집을 읽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몰래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인간과 자연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경산시민에게 남천강은 각별하다. 경산 시내를 흐르는 유일한 강이기도 하거니와 산책을 즐기고 자연과 교감하는 휴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이나 해거름이 질 무렵 강변에 나가면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몰려나온다. 달리기하는 이도 있고, 천천히 걷는 이도 있다. 농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도 있다. 걷다가 의자에 앉아 회청색으로 저무는 성암산을 바라보기도 한다. 모두 각자의 리듬대로 자유롭게 산책하거나 운동을 즐긴다. 경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에게는 추억의 강이기도 하다. 산업화 시대에는 남천강도 몸살을 앓았다. 상류에 들어선 공장과 주택에서 배출하는 오폐수로 강이 썩고 악취가 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강물에 발을 담그고 다슬기를 잡을 정도로 맑다.
▲ 남천강의 시원지인 하도저수지
남천(南川)은 남천면 용각산(龍角山)에서 시작한다. 햇살이 반짝이는 초가을날, 나는 차를 몰고 남천강의 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청도로 향하는 국도를 달리다 보면 경부선 철로 왼편으로 산자락을 끼고 난 좁은 길이 보인다. 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산길 끝자락쯤에 마을이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원리와 하도리 안내판을 보고 하천을 옆 일 차선 도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포도밭과 복숭아밭, 주택과 공장이 무질서하게 하천 이쪽저쪽에 자리 잡았다. 남천강의 상류는 올여름 태풍에 처참하게 망가졌다. 다리 공사와 하천제방 공사로 어수선하다. 게다가 고속도로 교각이 산천을 호령하듯 서 있다. 하도리 마을 끝까지 들어가니 저수지 둑이 보인다. 계곡 사이를 막은 하도 저수지가 남천강의 시원지이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다시 가보리라 다짐하면서 마을을 돌아 나왔다.
남천강은 남천면을 지나면서 강폭도 넓어지고 수량도 풍부해진다. 경흥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과 산전리 뒷산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합쳐지면서 비로소 강다운 면모를 갖춘다. 강물은 경산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다가 수성구 매호동에서 금호강과 합수한다. 전체 길이는 22.5㎞이다. 촌락과 도시가 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듯이, 경산 시내도 남천강을 끼고서 너른 들과 과수원, 마을을 형성하였다. 경산 시내는 남천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뉜다. 서편은 성암산이, 동편은 시가지이다. 경산역사 정문에 서면 남천강을 동서로 잇는 경산교가 보인다. 경산교를 건너면 중앙로가 시원하게 뻗어있다.
▲ 남천 보도교
강은 문화의 발상지이자 교통의 길이었다. 강을 따라 물자와 사람이 오갔고, 강을 따라 문명이 교류했다. 경산에도 남천을 따라 경부선 철로와 25번 국도, 대구 부산 간 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린다. 남천강과 금호강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 도로로 대구시민과 경산시민이 오간다. 남천강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진다. 정평동과 대평동의 넓은 들은 농경시대에 경산의 부를 상징하는 지표였다. 예전 ‘경산 사과’의 명성도 남천강이라는 젖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천강은 경산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고, 경산 사람과 함께 호흡하며 흐르고 있다.
2. 풍요와 추억의 상징 공간, 남천강
▲ 시민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남천강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천 개발이 시작되었다. 백천동부터 대평동까지 잔디밭과 수변공원,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었다. 파크골프장과 농구대, 야외 공연장까지 시민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자연석으로 강둑을 쌓고, 꽃창포와 부레옥잠, 부들 같은 수생식물을 심었다. 강물이 맑아지자 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도 하나둘 돌아왔다. 왜가리가 하얀 날개를 펼치며 창공을 날고, 청둥오리 가족이 강물 위를 노닌다. 운이 좋으면 수달도 가끔 만날 수 있다. 남천강에 동·식물이 깃든다는 것은 먹잇감이 풍성하다는 증거이리라. 올봄, 코로나19가 경산을 덮쳤을 때 남천강은 시민들의 숨구멍이었다. 마스크를 끼고서 아이는 킥보드를 탔고, 어른은 산책했다. 나도 매일 강변으로 산책 나갔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하소연도 하고, 고난의 시간도 강물처럼 흘러가리라는 위안도 얻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 남천강으로 나가보았다. 황토색 강물이 거칠 것 없이 흐르고 있었다. 비로소 남천은 강다운 풍모를 갖춘 채 바다를 향해 항해의 길을 나선 것이다. 강폭이 넓은 곳은 백여 미터나 되었다. 체육고교 앞 강둑에 부딪혀서 휘돌아가는 구간에는 파도가 일었다. 강물은 장애물이 나타나자 거친 몸짓으로 저항한다. 강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폭풍은 가혹한 시련이었나 보다. 나무와 풀은 몸을 강바닥에 눕힌 채 강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청둥오리 가족은 지난 밤 폭풍우에 지쳤는지 갈대숲에서 조용히 단잠에 빠졌다. 산책로에도 물길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남천강은 강바닥이 평평하고 폭이 좁아 하루 이틀만 지나면 물이 빠지고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흙탕물이 가라앉은 강은 맑고 고요하다.
남천강 서편 옥곡동과 정평동 일대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전에는 과수원 지대였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사과나무에 붉은 홍옥이 열리던 풍요로운 낙원이었다. 범람하는 강물이 실어온 유기물이 땅을 적시고 인간의 손길이 더해져 옥토로 만들었으리라. 경산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남천강은 추억이 서린 공간이다.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은 강으로 달려갔다. 헤엄을 치며 물장난을 하거나 강아지풀로 피라미를 잡으면서 놀았다. 물놀이를 하다 지치면 엄마 몰래 가져온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매운탕을 끓여먹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주인공 소년도 햇살이 반짝이는 강에서 낚시를 하며 청년으로 성장한다. 옥곡동과 서상동을 잇는 서옥교 다리 아래는 넝마가족이 거적으로 천막을 치고 살았다고 한다. 경산의 아이들도 남천강에서 돌팔매질을 하며, 피라미 낚시를 하면서 어른으로 성장했다.
3. 자연 생태공원으로 거듭나다
옥곡동 수변공원에 서 있는 아름드리 고목과 수양버드나무에 연두빛이 돌면 봄이 시작된다. 점점 짙어지는 연녹색의 잎은 계절의 변화를 일러준다. 수변공원에는 계절 따라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남천강 수변공원은 자연과 인간이 접속하고 교감하는 지대이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는 광장이다. 엷은 구름이 낀 가을에는 장려한 노을이 서쪽하늘을 수놓는다. 강물에 내려앉는 노을의 잔영은 ‘저무는 것들’의 애련함을 느끼게 한다. 옛 금곡초등학교에서 남천면내까지 강물과 길은 활처럼 휘어진다. 참나무에 겨자색 새순이 돋는 봄날이나 포도밭이 진갈색으로 물드는 가을날이면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인다. 나는 이 길을 ‘경산의 섬진강길’이라 명명한다. 완만한 곡선이 활처럼 휘어진 국도를 달리면 은빛 억새꽃이 바람에 나부낀다. 남천강은 경산의 아름다운 길을 연출하는 주역이다.
나는 매일 집에서 가까운 남천 강변을 산책한다. 산책하면서 나는 성암산과 강아지풀과 파꽃과 이야기를 나눈다. 실은 남천강을 둘러싼 풍경과 교감하고 나를 성찰한다. 경산의 수필가 허남진도 남천강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한다. “천천히 나를 돌아보면서 낮 동안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도 시들지 않고 꿋꿋하게 여린 생명을 이어갈 줄 아는 저 작은 풀꽃들처럼 선한 마음으로 어둑해져 가는 남천강변을 끝까지 걸어볼 것이다(〈남천을 걷다〉)”라고 다짐한다. 그렇다. 남천은 경산 사람에게 지리적 기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생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는 마음의 강으로 자리 잡았다. 나도 생의 오르막길에서 허덕일 때 저녁마다 남천강을 걸으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과수원이 있는 강둑길도 최근에 시멘트로 포장했다. 머잖아 포도밭과 과수원도 사라질지 모른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느림과 여유, 자연과의 공감에 대한 갈증은 증폭될 것이다. 남천강은 경산 시민에게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는 마음의 산책길이다. 그 길에는 피라미가 노니는 강물과 해질녘 강물에 내려앉는 노을과 봄날 연분홍 꽃구름을 피우는 벚나무와 쉬어가는 의자가 있다. 인간에게 자연만한 친구가 또 있으랴. 남천강이 있기에 경산 시민은 코로나도 너끈히 극복했다. 황도 같은 보름달이 밤하늘에 떠오르면 남천강도 달빛에 물든다. 그런 날이면 강변에 앉아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의 소음은 사라지고 풀벌레 소리와 강물 소리가 화음을 맞춘다. 강물과 내가 대화하는 시간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것이 인생길이 아니던가. 인생의 산책길에 함께하는 남천강이라는 동무가 있기에 행복하다. 남천강에 하얀 왜가리 한 마리가 풍경처럼 서 있다.
<글 / 이운경(이경희)>
< 사진/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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