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 등 산 편/경산곡곡스토리텔링

경산곡곡 스토리텔링에 사진을 싣다 - 15(압독국 고분군. 영남대박물관)(경산인터넷뉴스)

무철 양재완 2021. 3. 16. 17:27

압독국 고분에도 민들레는 피고~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임당리 고분군과 원룸촌

▲ 조영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에 노란 민들레가 피었다. 종일 햇살이 비치는 무덤의 남쪽에는 봄이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갯냉이는 벌써 꽃망울을 맺었고, 참냉이도 잎을 열심히 키우는 중이었다. 임당리 동네 농가의 담장에는 연두빛의 비비추가 올라와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1500여 년 전에도 봄은 왔을 테고, 여기저기 민들레가 피었을까. 무덤에 같이 묻힌 가족들도 아이의 손을 잡고 봄 마중을 나왔을 테다. 남편이 죽자 순장을 자처한 부인과 병으로 사망한 아이가 나란히 묻힌 가족 고분 앞에서 나는 잠시 장주의 나비가 되어 시간 여행을 떠났다.

 

압독국(押督國)은 경산지역에 있었던 고대사회의 소국이다. 현재 압량읍 지명과 임당리 고분군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압독국은 2,3세기 무렵에 신라에 합병되었으나, 자치권을 보장받아 이 지역을 다스렸다.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던 6세기 전반에는 김유신이 압독국의 주군으로 파견되어 직접 통치한다. 김유신과 관련한 유적이 압량 부적리의 말못과 연무유적지 등이다. 인근 진량 신상리 고분군, 자인 북사리 고분군, 대구 불로동 고분군 등도 압독국 시대와 연관된 유적지이다. 그래서 경산은 경주 대구와 언어나 생활풍습이 유사하다.

 

 

조영동 임당리 고분은 압량벌과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임당구릉지 위에 축조된 고분유적과 생활유적을 말한다. 1600여 기의 무덤과 주거지, 토성, 환호, 저습지 등 다양한 형태의 생활유적이 묻힌 타임갭슐이었다. 고분은 서기전 2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약 100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고분발굴의 계기는 도굴꾼이었다. 은제관, 순금제이식 등 장신구와 은제과대, 환두대도 등 국보급 유물이 도굴되어 해외로 밀반출 되는 과정에서 당국에 적발되었다. 그 유물들의 출처를 캐보니 임당유적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임당유적지를 사적 300호로 지정하고 영남대박물관에서 발굴을 시작하였다.


조영동 고분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무덤의 형태가 특이하다. 두 개 혹은 세 개씩 봉분이 겹쳐진 형태이다. 가족 합장묘이다. 오늘날 가족이 사망하면 고조할아버지 묘 아래 가족 묘역을 조성하는 것과 같다. 경주의 왕릉처럼 웅장하진 않지만, 봉분이 이어진 가족묘가 정겹다. 이런 고분의 형태에서도 그 시대 사람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건너가서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중을 들던 종도 순장하고,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순장했던 것이다. 장례용구로 무덤에 넣은 각종 부장품도 내세에도 삶이 지속된다고 믿었기에 많은 토기와 말안장 등을 묻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은 죽음을 슬프게만 받아들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 임당동 고분군

 내친김에 임당리 고분군까지 걸었다. 옛 마을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약간 경사진 골목을 걸어 내려가면 임당리 고분이 나온다. 무덤의 절단면을 볼 수 있게 작은 전시관을 지어놓았다. 문이 잠겨 들어가서 볼 수는 없고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법 큰 옹관묘와 석실묘, 회색 토기들이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복원한 토성 한가운데 훤칠한 나무가 서너 그루 있는데, 민묘가 나란히 보인다. 압독국 시대부터 명당자리였으니, 이후 후세인들도 계속 묘를 썼을 것이다. 임당리 고분 역시 전망이 좋다. 넓은 임당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분 앞에 서니 몇 개의 기억이 떠오른다. 고분이 발굴되기 이전 임당동에 살았던 이들한테 들은 이야기다. 마을 뒷동산에 올라가면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에서 나온 깨진 그릇을 주워와 닭 모이 그릇이나 할아버지방 재털이로 사용한다고 했다. 어릴 적 진량 신상리 뒷산에 가면 깨진 토기조각이 나뒹굴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산자락을 파헤쳤고, 동네 아이들은 무덤에서 나온 회색 토기조각을 주워왔다. 그것으로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했었다. 어른들은 무덤에서 주운 그릇에는 귀신이 붙었다면서 당장 갖다 버리라고 호통을 쳤다.


무덤은 죽은 자의 집이다. 후세인들에게 고대인의 무덤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고대인들의 삶과 꿈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경산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그들도 해가 뜨면 농사일을 했을 테고, 사랑과 이별 앞에 눈물도 흘렸겠지. 병고이든 전쟁이든 죽음은 압독국 사람들에게도 불가피한 생의 한계였을 것이다. 죽음을 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생이 너무 짧았던 것일까.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저생에서 이루고자 한 욕망의 흔적이 고분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인간의 삶이 한갓 꿈인 듯 허망하다.

 

2. 무덤 속에서 나온 유물들

▲ 영남대박물관

임당 유적지에서 큰 도로로 나와 길을 건너면 영남대박물관이 있다. 평상시에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개하니 누구나 들어가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대학박물관치고는 유물의 종류와 량이 엄청나다. 2019 9월에는 고인골, 고대 압독 사람들을 되살리다 특별전이 열렸다. 임당유적 습지에서 출토한 인골의 얼굴복원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경산사람들의 연령과 성별, 키와 각종 병리현상 등 다양한 인골 연구 성과가 공개되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영남대박물관을 자주 방문한다. 특별전은 전시기간을 놓치면 볼 수 없기에 꼭 가보는 편이다.


1982부터 영남대 박불관에서 세 차례에 걸쳐 임당유적발굴을 하였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영남대박물관 이층 임당전시실에 가면 볼 수 있다.  25,000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종류와 규모에 놀란다. 큰 옹관묘와 인골, 각종 토기와 동물 뼈, 철제무기, 마구유물, 귀걸이와 은제 허리띠, 유리로 만든 장신구 등 다양한 물건이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은 제사 용구로 추정한다. 칼이나 금제신발, 은제허리띠 같은 유물은 실제 사용한 물건이라기보다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이었다.

▲ 조개 담긴 긴목항아리

 제사용 토기에서 여러 동물 뼈가 나왔다. , , , 돼지 등의 동물 뼈와 어패류 껍질도 있다. 경산지역에서 고디라고 부르는 다슬기 껍질도 있고, 상어뼈도 있다. 지금도 경산지역 사람들은 제사상에 돔배기 고기를 꼭 올린다. 돔배기를 압독국 시대부터 제사상에 올렸다는 증거가 아닌가. 자인장 돔배기는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성인 키를 능가하는 대호(큰항아리)나 다양한 크기의 토기는 농경의 규모와 부, 권력의 상징물이었다. 밑이 둥글고 입구가 넓은 항아리는 곡식을 저장한 용구로 추정한다. 굽다리 토기들은 지금의 제사용구와 유사하다. 오늘날 경산지역의 제사문화가 압독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 금 장신구

장신구도 화려하다. 금과 은, 유리로 만든 장신구는 당시 지배계층의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하트 모양의 금귀걸이는 오늘날 사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었다. 나뭇가지 모양의 은제 관과 새 모양의 관모는 경주의 금관과 연결된다. 은제허리띠의 문양과 장식품도 마찬가지다. 압독국의 지배층은 경주의 신라왕실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임당전시실 인골 모형

임당전시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골이다. 임당유적지 저습지에서 인골 259구도 나왔는데, 압독국 여성의 얼굴을 3차원으로 복원했다. 주인공은 21~35세 여자로 확인됐다. 인터넷 검색으로 귀부인의 얼굴을 찾아보니 경산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인의 얼굴과 유사하다. 후덕한 귀부인의 모습이다. 순장의 흔적도 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묻힌 가족순장의 흔적도 있고, 어린 아이와 15세 전후 여성의 유골이 함께 출토되기도 했다. 순장제도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풍습이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으니, 사랑하는 사람이나 섬기던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을 당연시했을 지도 모른다.


영남대 정문 앞 큰 도로 왼쪽 편을 바라보면 둥그런 동산 같은 고분군이 보인다. 임당유적지 앞에는 공영주차장도 있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임당리 고분과 조영동 고분군까지 산책하듯 걸으면서 고대 압독국의 흔적을 밟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오래 전 초여름날, 아이들과 저녁노을을 바라보기 위해 조영동 고분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자 동네 아저씨가 트럼팻을 가져와 불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드럼팻 소리는 고분에 잠든 압독국 사람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처럼 들렸다. 어쩌면 트럼팻을 멋지게 불던 그 분도 흙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르겠다.


임당고분군은 경산지역 역사와 문화의 근원지이다. 임당리고분군에서 출발하여 조영동고분, 영남대박물관, 부적리 말못과 연무유적지, 경산시립박물관까지 역사답사 코스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살구꽃과 매화꽃이 만발한 임당리를 걸으면서 1500여 년 전에 이 땅에 살다간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남편이 죽자 남편을 따라 순장을 택한 여인의 심경도 상상해본다. 전쟁터에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던 아내는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무사귀환을 빌지 않았을까. 우리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흙으로 돌아갈 테고, 해마다 봄이 오면 민들레도 피어날 것이다.
 


<글 / 이운경(이경희)>
< 사진 / 무철 양재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