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성당과 이임춘 신부님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언덕 위의 성당
한 지역을 여행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몇 가지 코스가 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 지역의 역사를 집약해 놓은 박물관,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장소, 오래된 골목과 건축물 등이다. 가령 목포나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건축들을 둘러보면서 근대라는 시대가 간직한 빛과 그림자를 되짚어보는 여행도 의미 있다. 오래된 건축물에는 시간의 하중을 견딘 역사와 인간 삶의 무늬가 담겨 있으니까.
▲ 진입로에서 본 하양성당
하양에 가면 붉은 벽돌로 지은 90년이 된 성당이 있다. 옛 하양우시장(현, 하양공설주차장)에서 와촌가는 길로 백여 터 정도 가면 왼쪽 언덕에 뾰족한 종탑이 보인다. 안내판은 하양성당과 무학중학교 무학고등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다. 성당과 학교가 이웃한 까닭이다.
1931년 5월에 준공한 하양성당은 칠곡의 가실성당과 양식이나 크기가 유사하다. 두 성당건물은 전체적으로는 둔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지만,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고딕양식을 가미했다. 성당은 하양의 북쪽 무학산 기슭 동서리에 있는데, 1915년 하양공소로 처음 설립되었다. 1926년 김필곤(바르나바) 신부가 부임하여 하양본당 설립을 준비하여 1929년 하몽(Hamon, 하제안) 신부 때 고딕식 첨탑을 가진 본당과 부속사제관이 세워졌다.
▲ 1930년대 당시의 하양성당 모습
당시 사진을 보면 몇 채의 초가집과 논밭이 펼쳐진 가운데 우뚝 선 성당건물은 낯설고 이색적이다. 무학산을 배경으로 선 서양식 성당은 그 자체로 구경거리였다.
내게도 하양성당은 특별한 장소이다. 초등학교 시절,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엄마와 함께 하양성당에 와서 미사를 드리곤 했다. 서양 동화책이나 크리스마스카드에서 보던 뾰족한 종탑이 있는 성당은 웅장하고 멋있었다. 시골의 작은 아이에게 서양식 성당은 먼 나라를 향한 아득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긴 창문을 장식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에 햇빛이 비치면 아롱지던 무늬는 얼마나 황홀하던지. 훗날 유럽여행을 하면서 웅장한 대성당을 보며 기가 질리기도 했지만, 하양성당과 비슷한 성당을 만나면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하양에 서양식 성당을 지을 수 있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 외방전교회 대구대교구 초대 주교인 안세화 드망즈 주교가 베이징 관구에 건축기술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모문금이라는 기술자는 그의 스승인 강의관과 함께 1913년 대구에 왔다. 그들은 대구 남산동에 성유스티노신학교(대구가톨릭신학교)를 건립했다. 기술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은 모문금과 강의관은 교구청 주교관, 성바오로 수녀원, 남산동 성모당 등을 지었다. 신학교 안에 벽돌공장을 두고 건축에 필요한 벽돌을 직접 구웠다고 한다. 강의관은 귀국하고 대구에 남은 모문금이 하양성당을 지었다.
▲ 붉은 벽돌 외벽
한 지역의 건축물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의 집합체이다. 특히 성전은 인류문명의 상징물이자 당대의 지향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스 신전이나 유럽의 대성당, 우리나라의 고찰 등도 마찬가지다. 하양과 가까운 곳의 영천 은해사가 지역의 역사와 추사 김정희 같은 인물의 이야기를 품고 있듯이 말이다. 성장기에 하양성당 같은 붉은 벽돌집에 대한 로망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구건축에 대한 선망과 우리 것에 대한 열등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까닭이다. 훗날 역사공부를 하면서 벽돌집에 대한 환상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붉은 벽돌집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 이임춘 신부님이 건립한 바오로관
1961년 이임춘(팰릭스) 신부님 재직 당시 신자수가 늘어나자 성당을 증축하고 수녀원과 강당과 유치원 건물을 신축했다. 성당 입구 오른쪽에 벚나무 뒤로 낡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바오로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나 본래 성누가병원 직원 숙소로 지은 것이라 한다. 한국전쟁 직후 의료선교도 병행했는데, 하양성당과 옛 우시장 사이에 이층으로 지은 병원건물이 남아있다.
▲ 성누가병원(원형이 일부 보존된 상태의 모습)
성누가병원은 지역의 유일한 의원으로서 전쟁 직후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무료진료도 많이 해주었다. 그 결과 병원운영이 어려워 결국 문을 닫았다. 지금은 소유권이 개인에게 넘어가 벽체만 남기고 수리 중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평일 한낮 성당에는 인기척이 없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한 세기를 통과하면서 언덕 위의 성당은 지역민들의 애환과 영욕의 세월을 지켜보았을 테다. 1970년대에 하양성당은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여름캠프를 실시했다. 그 캠프에 참여하여 나는 처음으로 한약냄새가 풍기는 카레라이스를 맛보았다.
▲ 구 사제관
성당은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유입하고 전파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본당과 본당 앞 옛 사제관과 식당, 수녀원 건물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식관 지하실을 일명 ‘닭장’이라 불렀다. 전쟁 직후 영양부족에 시달리던 아이들에게 계란이라도 먹이려고 이임춘 신부님이 직접 닭을 길렀다. 그래서 식관에는 닭 울음소리와 닭똥 냄새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 하양성당 내부
본래 성당이나 교회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신을 영접하고 제사를 올리는 신전이 아닌가. 최근에는 건축물 자체가 지닌 역사적 문명사적 가치로 인해 관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칠곡의 가실성당이나 스페인의 아우디성당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초창기 건물은 용도만 바뀌었을 뿐 다행스럽게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예전에는 본당 주 출입구 앞에 계단이 있었는데, 증축 과정에서 없어졌다. 성당의 문턱이 더 낮아진 듯하다. 허물고 새로 짓는 데 익숙한 한국의 풍토에서 오래된 집이나 사찰, 교회를 만나면 무조건 반갑다. 오래된 절집을 누구나 즐겨 찾듯이, 하양성당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2. 하양의 예수, 이임춘 신부님
▲ 이임춘 펠릭스 신부
하양성당을 이야기하면서 이임춘 신부님을 빼놓을 수 없다. 1955년에 부임하여 1971년까지 하양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지역에 가톨릭 신앙의 씨앗을 뿌린 분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문화에도 상당한 역할과 공헌을 한 분이셨다. 한국전쟁 후 가난과 절망에 허덕이던 지역민들에게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고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다. 이임춘 신부는 경산지역에서 교장 신부님으로만 기억한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면서 나는 이임춘 신부님에 대한 기억과 기록,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많이 안타까웠다.
이임춘 신부님은 경산시 용성면 구룡마을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구룡마을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피신한 신자촌이었다. 어린 시절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한 아이로 자랐다. 조부 때부터 가톨릭에 입문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사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7세 때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으로 이사하여 의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 대구의 성유스티노신학교로 진학한다. 1944년 신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하자 서울 동성상업학교 신학과에 편입하였고, 가톨릭신학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신학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 한강다리를 죽을힘을 다해 건너자마자 다리가 폭파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유엔군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그때 맺은 유엔군 장교들과의 인연으로 종전 후 신부님은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한번은 신부님이 탄 지프차가 포탄에 맞아 전복되어 나흘간이나 흙더미에 묻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 군에서 예편한 신부님은 하양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다. 성당 신부로서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고 주민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피폐한 민심을 다독였다. 신부님의 인품에 감화하여 성당에 다닌 사람이 많았다. 이 외에도 학교 설립자로서, 사회사업가로서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다가 67세로 선종하셨다.
“성당문을 열고 모두 하나가 되자. 우선 살려놓고 그 다음에 희망을 갖자.”(이임춘 신부님 어록에서)
▲ 지역주민 교화에 나선 이임춘 신부님
1955년 5월, 하양성당에 부임한 이임춘 신부는 지역민의 가난과 무지를 몰아내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전쟁 직후 하양시내를 가로지르는 조산천변에는 피난민과 거지들이 우글거렸다. 전쟁 때 다친 상의군인,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며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성당 사제로서 신부님은 우선 그들을 먹이고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전 세계 교회와 구호단체에 일일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성당문을 활짝 열고 외국에서 온 구호물자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 성가병원 건립 모습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서 병원부터 지었다. 하양성당 조금 못 미쳐 오른쪽에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집이 ‘성가병원’이었다.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도움으로 병원을 짓고 개원하자 환자들이 몰려왔다. 원조를 받았으나 무료진료가 많아 적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신부님은 늘 돈을 구하러 다니셨다. 그때 얻은 신경성 위장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성가병원에 가면 대기실에 다람쥐 한 마리가 쳇바퀴를 돌리며 놀고 있었다. 우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랬는지 모르나 어린 내 눈에는 다람쥐가 신기했고, 그 장면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부님은 지역민들이 가난을 면하려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코틀랜드 출신 봉사자 수산나 메리 영거 씨와 힘을 합쳐 무학산을 개간한다. 유명한 ‘무학목장’을 만들어 지역민들에게 일터를 제공하고 경제적 자립을 꾀한다. 옥수수와 감자, 사료 작물을 심고, 젖소를 길러 우유를 제품화하는 단계로까지 사업을 키웠으나, 무학농장은 유가공업체의 방해로 결국 문을 닫는다. 지금도 무학산 중턱에 가면 그 당시 농장건물과 축사 일부가 남아 신부님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소규모 농업 위주였던 당시에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목축업을 시도한 일은 이임춘 신부님의 선지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3. 지역인재의 산실, 무학중고교를 세우다
이임춘 신부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무학고 교장을 지낸 권오선 선생을 만났다. 신부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분이고, 마지막 임종 때도 함께한 분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전화를 드리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권 교장선생님은 신부님의 부름을 받고 무학고등학교 설립 때부터 참여했다. 당시는 소수의 학생들만 대구로 진학하고, 지역의 대다수 학생들은 양질의 고등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신부님은 하양지역에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 무학중고등학교 전경
지역의 학부모와 학생에게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인재들이 지역을 위해 기여할 수 있게 하려면 하양에 명문학교가 꼭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사업이었다. 학교설립에 정부의 지원이 없던 시절이라 자금과 사람이 문제였다.
신부님 특유의 추진력으로 하양성당 옆에 터를 마련하고 학교를 세운다. 하양 한사리 경주 최씨 문중이 설립한 ‘학교법인 동산학원’을 인수하여 1966년 무학중학교를 건립한다. 경제성장과 고등교육에 대한 지역민의 열망이 강해지자 신부님은 고등학교 설립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사방팔방으로 자금을 구하러 다녔으나 쉽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대구 계산동에서 식당을 하던 배동경 여사가 평생 모은 재산을 학교건립 자금으로 쾌척한다. 1971년에 드디어 무학고등학교를 개교한다.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신부님이 직접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지역을 살리겠다는 신부님의 기도와 열정이 하늘에도 통한 것이다.
▲ 분신 같은 교정을 즐겨 걸으시던 이임춘 교장 신부님
하양성당 사제로 은퇴한 뒤 신부님은 아예 학교로 거처를 옮긴다. 창고를 개조하여 난방시설도 없는 곳에서 숙식하며 오로지 학교와 교사, 학생을 위해 헌신한다. 교장 신부님은 교사들에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수업을 하라고 주문했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피곤한 교장이었다. 권오선 선생님은 수학을 담당했는데, 당시로는 획기적인 수학강의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교실에 칠판을 여러 개 설치하여 학생들이 나와 칠판에 수학문제를 풀면 교사가 지도를 하는 방식이었다. 외국어 교육을 위한 어학실도 다른 학교보다 먼저 만들었다. 교사가 건의하면 교장 신부님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사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해주었다. 학생들이 오고 싶은 학교, 학생과 교사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는 학교로 만들었다.
교장 신부님은 훈화 때 변화와 창조를 늘 강조했다. “땅을 팠다가 그냥 메우더라도 무언가를 시도하라.”,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오더라.” 등 교장 신부님의 어록을 보면 어떤 철학으로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월급은 모두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옷 한 벌도 사 입지 않았다. 황무지에 학교를 세우고, 명문학교로 키운 훌륭한 교육자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경향사도대상(1984), 국민훈장 동백장(1995)을 수상했다. 이런 훈장보다 더 소중한 훈장이 있다. 신부님의 은덕으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학생들, 신부님의 배려로 도움을 받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어주신 것이다. 존경받는 스승이 귀한 시대, 이임춘 교장 신부님은 진정한 스승이었다.
4. 진정한 휴머니즘을 실현하신 분
“나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생각하면 마음의 평화가 온다.”(이임춘 신부 어록에서)
신부님의 인간적 면모가 궁금했다. 신부님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는지, 취미는 무엇이었는지 권오선 선생님께 질문했다. 구룡마을 산골에서 유년기를 보내신 분이라 천렵이나 낚시, 꿩 사냥 등을 좋아했다. 간혹 군위 인각사 부근 계곡으로 나들이를 가면 손으로 고기를 잘 잡으셨다. 학교 일에 몰두하면서부터는 그런 취미도 접고 오로지 일만 하셨다고 한다. 본가 가족에게는 더 없이 엄격하셨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힘닿는 대로 무엇이든 도와주고 베푸는 분으로 기억했다.
하루는 한 젊은이가 사제관으로 찾아왔다. 장사를 하고 싶은데 리어카 살 돈이 없다며 신부님께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 돈을 벌어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약속대로 그 젊은이가 돈을 들고 나타났다. 그때 신부님은 당신처럼 리어카 한 대 값이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라며 그대로 돌려보냈다. 나눔과 배품의 순환을 그렇게 가르쳤다. 평생 사제복을 즐겨 입었고, 평생 검소한 삶을 살았다. 간혹 신자들이 선물을 드리면 다른 이에게 바로 줘버렸다. 평생 낡은 사제복과 양복 한 벌로 지낼 만큼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분이셨다.
학생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7,80년대만 해도 영양이 부족하여 허약한 학생들이 많았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교장 신부님은 자주 통닭을 사주셨다. 집이 가난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본교 졸업생이 교사로 학교에 발령받아 가면 그 학교로 직접 찾아가 교장을 면담하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했다. 단순히 학교행정을 책임지는 교장이 아니라 학생들의 어버이로서 가슴으로 사랑하셨던 것 같다. 이런 연유로 무학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애교심이 유별나다.
학교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신부님은 교장직에서 물러나 사제의 자리로 돌아간다. 1994년 11월 10일 아침 신부님은 화장실을 다녀오다 뇌출혈로 쓰러진다. 권오선 성생님이 연락을 받고 달려가니 벌써 몸에 마비가 왔고 말씀도 못하셨다. 병원에서 수술을 했으나 11월 24일 선종하셨다.
▲ 이임춘 신부님 묘지(대구 남산동 성직자 묘지)
이임춘 신부님은 대구 남산동 성직자 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유품이라야 손때 묻은 기도서, 몇 가지 성구와 보온 도시락, 낡은 사제복이 전부였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평생 타인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셨던 신부님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다. 신부님 성격으로 보아 하늘나라에 가서도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수단에 이태석 신부가 있었다면, 경산 하양에 이임춘 신부가 있었다. 아마도 이 시대에 이임춘 신부님이 계신다면, 기꺼이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시지 않았을까. 한국전쟁 직후에는 한국이 가장 가난한 나라였기에 신부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봉사하는 삶을 사셨던 것이다.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이들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이태석 신부의 조건 없는 사랑 때문이다. 시대와 장소와 대상만 다를 뿐이지 두 사제의 헌신과 사랑은 동일한 무게와 질량을 가진다. 그럼에도 이임춘 신부를 기리는 기념비나 전기를 담은 변변한 기록물이 없어 안타깝다.
▲ 제자들이 건립한 이임춘 교장 신부님 흉상
선종 후 신부님의 마지막 뜻을 받들어 동문들과 교직원이 힘을 합쳐 1996년 ‘임춘학숙’ 기숙사를 건립하였다. 하양성당 옆 무학중·고등학교 교정에 가면 신부님의 흉상이 있다. 무학고등학교 내에 이임춘 교장 신부님을 기리는 역사관도 있다. 신부님의 생애를 만나면서 감동이 물결쳤다. 존경하는 사제나 스승이 드문 시대에 진정한 휴머니즘을 실현하신 분,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던 분이 이임춘 신부님이 아닐까. 가톨릭 사제로서, 교육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좋은 삶을 사셨던 분이었다. 지역사회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지역사회의 밀알이 되신 이임춘 신부님. 하양성당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 예수성심상
▲ 천주의 성모 마리아상
▲ 하양성당 첨탑 종각
공간과 인물, 서사는 장소애를 유발하는 주요 요소들이다. 하양성당이라는 공간과 건축물은 근대화의 과정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이다. 하양성당이라는 공간이 내게 특별한 장소애를 유발하는 이유는 인물과 사건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평생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이임춘 신부님의 생애는 하양성당과 무학중·고등학교와 함께했다. 신부님이 보여준 지역사랑과 휴머니즘이 그 공간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곳으로 만들어준다. 평생 지역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한 한 인간의 생애와 공간에 대하여 기억하고자 이 글을 썼다.
* 이 글은 《하양성당 60년사》와 무학고등학교 박경현 교장의 글, 권오선 교장의 증언을 참고로 하였다.
<글 / 이운경(이경희)>
<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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