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 등 산 편/경산곡곡스토리텔링

경산곡곡 스토리텔링에 사진을 싣다 - 23(하양 육영재)(경산인터넷뉴스)

무철 양재완 2021. 7. 15. 11:03

참된 선비를 기르던 하양 육영재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민관(民官)이 힘을 모아 학교를 건립하다;

 

▲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2020. 7. 13.지정,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440번지 소재)

계미년(1823, 순조 23) 유월 보름, 교동마을은 낙성식 준비로 분주하였다. 육영재를 짓는 도중에 하필 물난리가 나서 재정과 행정이 분산되었으나, 유림들의 협조와 지원으로 공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낙성식을 축하하듯 날씨는 화창했다. 하양현감 이태승도 아침 일찍 의관을 차려입고 흥분된 마음으로 동헌으로 향했다. 조정의 지방 관학 강화 정책과 수령의 흥학(興學) 정책이 결실을 맺었으니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세운 육영재(育英齋)의 낙성식이 거행되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차일을 치고, 백일장 준비도 하고, 인근 영천과 자인의 수령도 초대하였다. 하얀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갓을 쓴 유림들의 행렬도 이어졌다.

▲ 하양현 동헌이 있던 한사리에서 본 육영제 전

며칠 전부터 낙성식 잔치 준비를 했다. 소와 돼지도 잡고, 떡과 술을 준비하고, 각종 음식을 준비했다, 잔칫날 풍악이 빠질 수 없으니 농악대를 불러 분위기를 돋우었다.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고을현감의 치적사업이었고, 지역 유림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사업이었으니 온 고을이 축하할 일이었다. 육영재 낙성식 후 7월에는 지역 유생 15명이 참가하는 거접(시부(詩賦) 경연대회) 행사가 열흘 간 이어졌다. 현감이 출제한 시제(詩題)를 두고 우열을 가렸다. 거접 종료 후 7 16일에 육영재 낙성기념 백일장을 열었는데, 인근 유생 70여 명이 참가하여 솜씨를 겨루었다. 이에 고무된 현감은 21일에 또 유생들을 모아 백일장을 열었다고 한다. 작품이 우수한 20명에게는 귀한 소고기를 포상했고, 동몽들에게는 종이를 상품으로 주어 치하했다.

 

하양읍 동서리 440번지에 위치한 육영재는 조선후기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민과 관이 함께 세운 교육기관이다. 육영재는 말 그대로 인재를 교육하여 길러낸다는 의미로, 유생들의 과거시험 준비와 학문진작을 위해 전국 군현에 건립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양사재(養士齋)로도 칭한다. 조선시대 교육은 관립인 향교와 사립인 서원이 맡아서 했다. 조선후기로 오자 향교의 교육기능이 약화되고, 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의 영향력이 커진다. 오죽하면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겠는가. 영조 정조 순조 연간에 향교의 교육기능 강화를 위해 지방에 양사재나 육영재 같은 관립학교가 설립된다. 이는 지방 유림들의 지원을 얻어 향촌통치를 원활히 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하양 육영재는 현감으로 부임한 이태승과 김이덕, 채석이, 허장 등 하양지역 유림들이 주도적으로 건립한 학교이다. 건립비용은 전액 성금과 기증으로 분담했으며, 부조전을 낸 사람이 무려 247명이나 된다. 육영재 건립에 관한 모든 사항은 항목별로 조전록(助錢錄)’에 세세하게 기록했다. 부분별 책임자와 설계 작업과 시행 과정, 찬조자 명단과 금액, 낙성식과 축문 등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1823 2월에 터를 선정하여 그해 6월에 준공했으니 4개월이 걸린 셈이다, 주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여름교실인 대청마루와 겨울교실인 온돌방 세 칸도 같이 들였다. 부속 건물인 기숙사와 대문 등 건물 세 동을 짓고 육영재 편액을 걸었다. 당시로는 최고의 기술과 자재로 지은 건물이었을 것이다. 필요한 재목은 환성사 안양실을 해체하고, 부족한 목재는 신령면에서 매입해 사용하였다. 당시는 사찰도 향교 관할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육영제 진입로, 하양읍 한사리와 교리 중간지점에 있다. 
 

오늘날 교칙에 해당하는 재규(齋規)를 정했는데 공부 규칙뿐만 아니라 생활 규칙도 엄격하게 정했다. ‘매일 일찍 일어나 세면한 다음 의복과 두건을 단정히 갖추고, 방과 마루를 물 뿌려 쓸고 안석과 책상을 털고 닦으며 붓과 벼루를 정돈한 뒤에 바로 책을 편다.‘ 혹은 무릇 독서는 구두만 외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글의 뜻을 충분히 찾아내어 몸과 마음에 체험해야 한다라며 책에서 배운 것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선비들이 붓을 뭉개고 먹으로 더럽히는 것은 자제의 직분을 저버리는 것이고, 책상과 벼루에 낙서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가장 불결한 행동이다. 절대 깊이 경계해야 한다라며 낙서를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공부방법과 태도, 생활 전반에 대한 엄격한 질서와 규칙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 육영재중수기

1905년 육영재를 수리한 후 작성한 육영재중수기에는 마을의 많은 스승과 선비들이 육영재의 교육을 직접 맡아 유생들을 기르시니 봄과 여름에는 과업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는 강습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봄과 여름에는 과업 또는 과거시험 과목인 공령문(功令文, 과거 시험에 출제되는 시나 문장)을 시험 치고, 가을과 겨울에는 성리학을 강론 강습하였다. 육영재에서 사용한 교재로는 소학, 논어, 대학, 중용, 주역 등 주로 성리학의 가르침을 담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다. 하양현의 문과 급제자는 조선전기에 허씨문중에서 6명이 나왔다. 조선 중기 이후 사마시 합격자 12명 중 절반인 6명이 육영재 설립 후 나왔으니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육영재가 지역의 학문을 장려하는 한편 사마시합격자 배출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까지 70여 년간 육영재는 유지되었다. 근대교육기관인 초등학교가 생겼으나, 일부 유림들은 일제식민체제 강화를 위한 국민교육을 거부하고 전통교육을 고집했다. 그들 나름의 저항운동이었으리라. 육영재임안이라는 책자에 보면 학교 운영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알 수 있다. 임원의 직제는 훈장 1, 유사 2인 체제를 기본으로 했으며, 70여 년간 75명의 훈장, 유사 218명이 재임했다. 유사는 학교 운영의 실무와 재정 등을 담당했으니 운영위원이라 할 수 있겠다. 주로 하양 인근의 명문가에서 훈장을 선발했다. 훈장으로 선발되는 것은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가문을 빛내는 일이기도 했다. 학문을 연마한 후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보람 있는 일이 아니던가.


육영재에 입학하여 청운의 꿈을 펼치기 위해 공부할 수 있었던 젊은 선비들은 행복했으리라. 입학자격은 노비를 제외한 양인이면 누구나 가능했으며, ·리 단위로 선발하였다. 아마도 현재 명문대학 입학만큼 치열했을 것이다. 선발된 교생들은 학문에 전념했고,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훈장이 벌을 내리기도 했다. 무릇 공부는 학교에 가서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동무들과 함께할 때 능률이 오른다. 당시 하양의 유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비록 벼슬길은 쉽지 않았으나 선비는 공부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당시에는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도()에 이르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육영재는 훌륭한 인성교육기관이며 지식인들의 뜻을 펼치는 산실이기도 했다. 사람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은 미래를 기약하는 확실한 희망이며 대안임을 육영재는 증언한다.

 

2. 육영재의 학풍과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

▲ 하양향교 전경

 학교는 지역 문화의 중심이며 미래이다. 학교가 있는 마을은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면학분위기가 조성된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은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이다. 한국전쟁 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런 번영을 누리게 된 것도 교육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혼란과 가난이 가중될수록 교육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진다. 조선후기 곳곳에 서원과 양서재가 건립되고 선비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울러 천하의 인재를 발굴하여 교육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다. 경산이 대학도시가 된 것도 지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학풍을 중시하는 지역정서와도 무관하지 않다.

▲ 하양향교

조선시대 교육은 향교와 서원이 담당했다. 향교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몸소 실천하신 성현들의 제사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향교의 건물배치를 보면 전면에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 후면에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한다. 하양향교는 교육공간을 따로 두었다. 최재림 선생(전 하양향교 전교)의 설명에 의하면 하양향교가 비좁아 안산에 터를 잡아 육영재를 지었다고 한다. 현감 이태승은 공사가 얼추 마무리된 즈음에 현장을 방문하여 그 문에 들어서니 그 제도와 규모가 흡족하였고, 마루에 올라보니 자리 잡은 터가 사랑스러웠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이태승과 교유가 두터웠던 진사 김익동도 황폐한 고을에 원대한 경륜을 남겼다.”라며 칭송했다. 육영재 설립은 당시 고을 현감의 뜻과 지역 유림들의 바람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작은 건물에 불과하지만, 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경제력과 의지가 필요한 대역사이다.

▲ 육영재 발굴 및 보전에 앞장 선 최재림 선생(우)과 허광렬 선생

 2020년 지역 유림들의 노력으로 하양 육영재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다. 육영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앞장 선 최재림 선생(, 대한노인회 경산지회장)과 허광렬 선생(, 하양향교 전교)을 만나러 이른 아침 한사리로 향했다. 최재림 선생은 1990년대 하양향교 전교직을 맡은 후 육영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조사와 발굴, 복원에 노력했다. 하양 육영재는 요즘으로 치자면 하양향교 부속학교이다. 향교의 중요한 부속기관이었으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선생은 전교 퇴임 후 경산시에서 예산을 받아 육영재를 전면 보수 수리한다. 자체기금으로 차로 진입로를 사들이고, 포장공사와 교각건립, 주차장 공사 등을 경산시에서 지원받아 확장한다. 육영재 재산인 전답(田畓)의 측량과 정리도 하고, 상수도 시설도 갖춘다.

▲ 수령 577년 하양향교 명륜당 옆 은행나무(경산시보호수)
 

육영재와 관련한 책자 가운데 보인계첩(輔仁?帖)(1898)이 있다. 이 책은 하양지역 선비들이 학문 증진과 육영재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만든 보인계에 관한 책이다. ‘보인(輔仁)’은 말 그대로 훌륭한 덕을 쌓도록 벗끼리 서로 격려하고 도움을 준다는 뜻으로 모임의 취지를 반영한 작명이다. 이 모임에 참여한 이는 105명으로, 각출 금액, 모임 일자, 변리에 관한 내용 등이다. 이 보인계는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데, 그 중심에 최재림 선생이 있다. 지금도 5월 중 날을 잡아서 유림들이 흰두루마기를 입고 육영재에 모여 총회를 한다. 선생은 육영재 창건 시 참여한 인물과 공사비 내역, 사적, 기문, 절목, 각종 문서 등을 기록한 하양육영재지(河陽育英齋誌) 1998년에 속간하기도 했다. 전통문화의 산실인 강학기관으로 육영재를 복원하려 했으나 재원인 전답의 관리가 힘들어 포기했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 보인계첩을 전승한 육영제 총회 장면 
 

최재림 선생과 인터뷰 진행 중에 하양향교 전교를 맡고 계신 허광렬 선생이 도착하셨다. 두 분은 하양의 문벌인 하양 허 씨와 경주 최 씨 문중을 대표하여 하양향교와 육영재를 관리 보존하는데 앞장서고 계신다. 하양향교와 육영재가 구축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경산시에서 간행한 경산시지(1997)에 육영재와 관련한 내용이 빠진 것을 알고 건의하여 수록하기도 했다. 조선시대까지 하양은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고, 1914년 경산군으로 행정개편이 되기 전만 하더라도 독자적인 행정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화성지(花城誌)(1933) 이후 하양지역의 기록물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최재림 선생은 2017 하양읍지 편찬위원장을 맡아 수행하기도 했다.

▲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

 하양 육영재를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기록의 중요성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삼성현역사문화관 특별기획전 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2020. 12. 8. ~ 현재)를 관람하면서 방대한 자료와 기록물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육영재 설립 취지부터 건립에 참여한 하양지역 유림들의 명단과 기부 금액, 공사일정, 운영체제 등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책자가 남아있었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 하양지역의 정치와 경제규모, 교육과 문화, 문벌 간의 관계 등을 알 수 있다. 전통의 가치는 현재적 의미를 부여할 때 발생한다. 육영재와 하양향교는 지역의 미래를 인재양성과 교육에서 찾고자 했던 선비들의 희망이 서린 공간이다. 아울러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도리를 가르치고 학습하던 곳이다. 특히 육영재의 교칙인 재규(齋規)를 들여다보면 옛것이라고 모두 부정하거나 버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된 공부란 지식습득 뿐만 아니라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실천, 윤리의식 등을 함께 교육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영재 마루에 서서 경산정신의 요체는 무엇이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참고자료

-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 하양 育英齋, 참된 선비를 기르다 도록(2020)

- 채광수, 19세기 경상도 하양현 育英齋 설립과 운영 양상 논문 (2020)

- 하양읍지 편찬위원회, 하양읍지 (2017)


 

< / 이운경(이경희)>

< 사진 / 무철 양재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