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금호서원(琴湖書院)과 문경공 허조(許稠)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배산임수의 명당 부호리
▲ 금호강 대부잠수교에서 바라본 부호리
대부잠수교를 건너니 금호강변에 노란 해바라기꽃이 줄지어 피었다. 대조동과 부호동을 잇는 대부잠수교와 강변공원은 금호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강변공원에는 철따라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홍초와 해바라기, 코스모스가 순서대로 피면 사진을 찍으러 나온 시민들로 붐빈다. 어느 해, 하얀 백로들이 짝짓기를 하면서 군무(群舞)를 추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해질녘이면 금호강에 노을이 내려앉아 보랏빛으로 물들고, 새들도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북으로는 장군봉을 병풍 삼고 남으로는 금호강을 끼고 앉은 마을이 하양 부호리다.
▲ 마을 입구에 금호서원 안내표지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한 허후, 허조의 충렬을 기리기 위한 정충각이 있다.
부호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호강은 강 건너 대조리와 환상리 너른 들판을 적시는 젖줄과도 같다. 부호리는 하양 허씨의 세거지로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솥뚜껑처럼 둥그런 지형이라 부호리라고 부른다. 일명 부호 허씨라고도 부르는데, 하양에 본을 둔 유일한 성씨이다. 경일대학교와 호산대학교 간판이 보이고, 좌회전을 하면 상가와 원룸이 즐비한 대학촌이 나타난다. 오른쪽 동네가 부호리이다. 이 작은 동네를 주목하는 이유는 태종과 세종 대에 거쳐 예조참판과 이조판서, 좌의정을 지냈고, 『국조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한 문경공 허조(許稠)의 후손들과 그를 모신 금호서원(琴湖書院)이 있는 까닭이다. 마을입구 도로변에 있는 허조 · 허후 부자를 기리는 ‘정충각(旌忠閣)’이 있는데, 부호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부호리는 하양 허씨 집성촌이다. 지역에서는 종중의 단합이 잘 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경일대학교와 호산대학교가 들어오고 나서 부호리 마을은 원룸촌으로 변모했다. 금호서원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길을 올라가니 하양 허씨 종중 사무실이 나왔다. 현재 하양향교 전교를 맡고 계신 허광렬 선생과 현 문중회장인 허동순 회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무실 벽에는 허씨 종중의 족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출력하여 붙여놓았다. 독특한 풍경이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하양허씨세전가훈(河陽許氏世傳家訓)’ 액자도 걸어놓았다.
▲ 종친회 사무실 벽에 걸린 ‘하양허씨세전가훈(河陽許氏世傳家訓)’
家傳忠孝 世守淸白(가전충효 세수청백) : 가정에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법도를 이어나가고, 사회에서는 대대로 청렴하고 결백한 가풍을 지키도록 하라.
持身勤儉 友愛敦睦(지신근검 우애돈목) : 몸가짐을 잘 닦아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척들과 화목하라.
接人恭謹 敎子義方(접인공근 교자의방) : 남을 접대 할 때는 공손하고 삼가하고 아들딸을 가르칠 때는 옳고 바른 도리를 지키게 하라.
處事必公 不求名利(처사필공 불구명리) : 일을 처리 할 때는 반드시 공명정대하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명예나 이익을 탐구하지 말라.
仁智忠信 博聞禮節(인지충신 박문예절) : 인자하고 지혜롭고 참되고 미덥고 널리 배워 견문을 넓히고 예의범절을 잘 지키도록 하라.
‘하양허씨세전가훈’을 찬찬히 음미해 본다. 한구절 한구절 모든 구절이세상살이와 인간다움의 기본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일 이런 글귀를 보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명 어떤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갈 사람이나 조직을 책임지는 이라면 한두 가지만 실천해도 성공적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 금호서원에 봉안된 허조 선생 영정, 허씨 문중 남자들 사진을 모아 과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사무실에서 나와 금호서원으로 향했다. 허조 선생을 불천위로 모시는 금호서원에서는 해마다 봄에 향사를 지낸다. 허조 선생 영정은 최근에 새로 봉안했다고 한다. 허씨 문중 남자들 사진을 모아 과학적으로 재구성하여 영정을 그렸다고 한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낡은 중세의 의례를 지키는 일이 부질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집안의 훌륭한 조상을 섬기고, 조상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절이자 풍속이다. 더군다나 고향에서 문중과 전통을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뿌리 깊은 나무의 후손들이 각지에서 살아가는 힘이 된다.
2. 문경공 허조의 정신이 흐르는 금호서원
▲ 위로부터 정조대왕(정종)이 하사한 사액 현판 ▲ 서원 전경 ▲ 배치도 ▲ 경덕사 ▲ 준도문 ▲ 성경재 ▲ 수교당
오래된 소나무가 허조 선생의 기백과 정신을 상징하듯이 금호서원을 둘러싸고 서 있다. 금호서원은 숙종 10년(1684)에 문경공 허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처음에는 하양읍 금락리에 지었다가 사이동(현, 서사리 84번지)으로 옮겼다. 정조 14년에 하양 유림을 대표하여 최구석이 상경하여 정조임금으로부터 ‘금호’라는 사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하지만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을 헐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1913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현 부호리 114번지와 금락리에 금호서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49호)을 복원했다.
▲ 하양읍 서사리 84번지(사이동) 에 있는 금호서원 유허비 비각과 하마비
3. ‘조선조 최고의 이조판서’ 허조
허조(1369~1439)는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세종조의 3정승으로 불린다. 호는 경암(敬菴)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허조는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하양현 금호동에서 출생했다. 고려 우왕 때 진사시에 급제한 뒤, 조선 태종 대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거쳐 세종 때는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차례로 지냈다. 특히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이라 왕에게 직언도 스스럼없이 했다고 전한다. 세종이 총애한 신하로서 조선왕조의 법치와 예법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한다. 허조는 조선조 하양을 대표하는 큰 인물인 셈이다.
허조는 드라마에도 나올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다. 태종 시대부터 세종 대까지 사회질서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조에서 복무했는데, 인재를 추천하고 검증하고 등용하는 역할도 겸했다. 특히 토론하는 정치문화를 조성했으며, 왕과 신하의 간극을 좁히는데 기여했다. 성리학을 국정 이념으로 세운 조선식 국정 운영 및 예제의 정비에 힘을 쏟았다.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왕실과 조정의 예법을 완성한다. 오례(五禮)란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殯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를 일컫는다. 허조는 비록 중국식 예제라도 조선과 맞지 않으면 본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체적 국정운영을 주장했다. 허조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보호하여 세종 대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일조를 했다. 그래서 허조를 두고 ‘조선조 최고의 이조판서’라는 평가를 한다. (박현보, 「세종의 제도화 리더십과 허조의 역할」).
4. 하양 허씨 문중과 인물
허씨의 시조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아유타국 공주 허황후이다. 모계성을 시조로 하는 하양 허씨 문경공파는 2018년 모계혈통 중심의 족보 제작을 시작하여 2021년 올해 완성했다. 한국사회에서 족보란 부계혈통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며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엄연히 종중의 일원임에도 본인의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남편이나 사위의 이름만 족보에 올렸다. 새로 제작한 문경공파 세보에는 딸의 이름은 물론 외손과 며느리의 이름도 당당하게 올라 있다. 허광렬 전 종중회장은 “허씨는 한반도 최초의 다문화가정에서 나온 성씨로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남녀평등 족보를 제작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37세손까지 내려와 약 2만 명의 자손들이 퍼져있다. 옛날 기록을 샅샅이 뒤져서 여성 종중원의 이름을 찾아 새 족보를 완성했다고 한다.
▲ 정조대왕이 금호서원 선액시 내린 어제문
하양 허씨는 하양지역의 문벌로서 조선시대 전반을 거쳐 강력한 가문으로 자리 잡는다. 조선조 하양 출신의 문과 급제자는 허조를 포함해 모두7명인데 모두 허씨 가문이다. 허조의 후손들은 임진왜란 의병활동에도 앞장선다. 옛 하양읍사무소 터에 남아있는 「임진창의제공하양사적비」에 “난형난제 허대윤 허경윤의 공덕은 번갈아 수문을 사수하는 수문장으로 함께 녹훈에 기록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허병률 의사가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하양 허씨 문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했다. 전쟁이나 가뭄 같은 위기 때 가문이 귀족의 의무를 다하면 그 가문은 지역에서 신임을 얻는다. 선조들의 이런 발자취가 후손들에게 더없는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이 되고 있다.
근래에도 하양 허씨 문중은 세상에 이름을 떨친 유명 인사들이 많지만 필자는 모범적인 삶으로 특별히 기억되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대구 파티마병원장을 역임한 흉부외과 전문의 허동명 박사이다. 그는 진량읍 문천리 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자연기흉치료의 권위자로 다기관 대량연구를 주도하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무엇보다 허 박사는 2010년 ‘설명 잘하는 의사’로 뽑히기도 했고, 직원들이 뽑은 ‘베스트 닥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저소득 가정의 환자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고, 해외 의료봉사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한다. 의술도 뛰어나지만 슈바이처 정신을 실천하는 보기 드문 의사이다. 고향사람이든 종중사람이든 누구든지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허동명 박사야말로 허조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는 인물이 아니겠는가.
5. 신법고창신의 터전 금호서원과 하양
집 가까이 금호강 물소리 들릴 듯 하고,
청산은 사방에서 헌〔청금헌〕의 뜰을 내려다보네.
꽃나무와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어 넉넉하니,
문경공의 유풍(遺風) 신령도 앎이로다.
― 『화성지』 권2, 「제영(題詠)」
하양현감 남헌명이 동헌에서 읊은 시의 일부인데, 말하자면 ‘하양찬가’인 셈이다. 하양고을은 젖줄인 금호강이 흐르고, 화성(花城)이라 부를 만큼 아름답고 넉넉한 곳이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 예악제도의 기틀을 세운 문경공 허조(許稠)의 유풍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는 고장이 하양이다. 자연 풍광이 아무리 수려해도 인물이 빠지면 미완이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피는 봄날이면 부호리 마을 뒤쪽 골짜기에는 아름다운 풍경화가 펼쳐진다. 가을바람이 부는 날에는 금호강변으로 나가서 꽃구경하고 금호서원에서 하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 허조 선생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이다. 서원의 오래된 기와와 낡은 대문을 기리는 것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신법고창신(新法古創新)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하양 허씨의 본산인 금호서원에서 허조 선생의 유훈을 되새겨본다. 공평한 인재등용과 그 인재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치도록 뒷받침한 허조 선생의 행적은 이 시대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글 / 이운경(이경희)>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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