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반곡지는 ‘무릉도원’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 하늘과 물, 그 사이를 잇는 왕버들과 복사꽃
▲ 경산시 남산면 소재 반곡지
반곡지 가는 길, 대구한의대를 지나면서부터 좌우로 꽃밭이 펼쳐진다. 들판은 물론 산등성이에도 온통 분홍 물결이다. 내 눈도 마음도 연분홍 물이 든다. 옛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길이 한층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축사는 사라지고 예쁘게 단장한 카페와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다. 팔각정에 올라 내려다본 반곡지는 봄 축제를 벌이고 있다.
경산시 남산면 반곡리에 있는 반곡지는 1903년에 만든 유역 면적 79ha의 농업용 저수지이다. 반곡이란 이름은 삼성산 자락의 골짜기에 소반처럼 생긴 마을 지형에서 유래됐다. 행정구역 통합 이전에는 저수지 아랫마을이 외반마을, 윗마을이 내반마을이었다. 반곡지도 원래는 외반지로 불렸다. 소반을 닮아서일까. 주변의 풍광을 반곡지는 온몸으로 담는다.
복숭아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둘레길을 걸어 왕버들이 줄지어 서 있는 둑에 섰다. 100여m 되는 둑에 연초록 잎으로 단장한 왕버들과 분홍빛 복사꽃이 수면을 경계로 환상의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하늘과 물, 그 사이에 왕버들과 복사꽃뿐이다. 사진 애호가들이 즐겨 사각의 프레임 속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이다. 왕버들의 수령은 저수지 축조 연도로 보면 100년, 나무의 둘레로 보면 200~300년은 된 것 같다.
둑에 뿌리를 내린 고목은 모두 물을 바라본다. 그중에 몇 그루는 등걸과 가지를 아예 물에 담그고 있다. 물속에 비친 제 모습에 홀렸는지 나르키소스가 된 왕버들은 물속에 비친 자신에게 빠져들고, 나는 그림 같은 풍경에 빠져든다. 나무가 아프다고 가까이 가지 말라는 팻말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나무와 함께 자기 모습을 사진 속에 담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안달이다. 이 봄날에 저수지는 저대로 꽃을 피우고 나는 나대로 넋을 놓는다. 보는 이들의 탄성에 부응하려는 거꾸로 박힌 나무와 꽃이 날개를 활짝 펴는 공작처럼 일렁이는 물살에 몸을 떤다. 나도 물속 풍경을 건져 올려 사진 속에 챙겨 담는다.
반곡지는 전국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사진찍기 좋은 녹색명소'와 2013년 안전행정부의 '우리 마을 향토자원 베스트 30선'에 선정되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지금은 사진 애호가뿐만 아니라 연인, 가족 나들이객 등,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복사꽃과 어우러진 봄 풍경은 화사하고, 왕버들 숲이 우거진 여름은 청청하다. 가을은 단풍과 어울려 운치를 더하고 잎을 떨군 겨울은 호젓해서 좋다. 사계절 모두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영화 ‘허삼관’의 촬영지라고 해서 그 영화를 관람했다.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허삼관매혈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였는데, 주인공 허삼관이 더 많은 피를 팔기 위해 반곡지 물을 퍼마시는 장면이 잠깐 나왔다. 1960년대 판자촌이 배경인 영화에 등장했으니 이곳은 아직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2014년 영화 촬영 때와 지금의 주변 모습은 많이 변했다. 풍광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들어서고, 멋진 전원주택이 선을 보인다.
시인들의 시에도 반곡지는 자주 등장한다. 시인의 감성을 통해 반곡지는 더욱 멋지게 태어난다.
고양이 털 같은 햇살이 겨드랑이를 간질이면
결 고운 바람 더불어 물안개 피어나는 반곡지에 간다
누군가 반곡지에 가면 무엇이든 다 아름답다 했다.
누군가 반곡지에 가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진다 했다.
말없이 물에 잠긴 둥근 수산들도
몇 백 년을 회춘하는 늙은 왕버들의 새순도
다 아름답다
다 아름다워진다
인간의 모든 형식에 존경을 표하는 거리를 떠나
굳은 심장이 풀리는 곳
반곡지에 가면
저 물 속에 잠기고 싶은 것은
저 투명한 소반에 담겨
누군가의 그리운 물안개로 피어나고 싶은 것은
내가 걸어온 길이 속세의 깊은 강 탓일까
사람들은 렌즈를 갈아 끼우고
빛을 투망한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곳
침묵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곳
반곡지…
어디선가 물뱀 한 마리가 물살을 가로질러 간다
문이 열린다
세상의 모든 문들은 등 뒤에서 닫히고
세상의 모든 문들은 가슴 앞에서 열린다
전종대 시인의 『반곡지』 전문
긴 세월 빠져든 것이
어찌 발목뿐이랴
물에 잠긴 정이라
중심 잡기 어려웠지만
나를 춤추게 하는 풍경은
내 발목을 어루만지던
너의 숨결이었다.
어느새
너에게 발목 잡혀 사는 날들이
마냥 즐거운 왕버들
전명숙 시인의 『반곡지, 왕버들』 전문
◆ 나의 살던 고향은
수년 전 어느 비 오는 날, 이곳이 고향인 친구와 복사꽃 길 걷기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날씨가 맑아도 좋지만, 우산을 쓰고 우의를 입고 빗속을 걷는 것도 괜찮았다. 안개가 내려앉은 주변 산과 어우러져 더욱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종일 비가 내린 날이었는데 대구와 경산지역 주민 150여 명이 참가하여 함께 걸었다. 경산의 대표 농산물인 복숭아 홍보를 겸해서 열린 행사는 상대온천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남산면 반곡리~조곡리~조곡서원~안지비각~송내지~반곡숲~반곡지를 거치는 총 7㎞ 구간에서 펼쳐졌다. 빗물을 머금은 도발적인 복사꽃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누군가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고 함께 따라 불렀다.
도중에 문충공 안우와 그의 현손 안지를 모시는 사액서원인 조곡서원에 들러 탐진안씨 후손으로부터 서원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듣는 시간과 떡메치기 행사도 열었다. 가족사진 콘테스트 이벤트도 열렸다. 회사에서 단체로 참가한 직장동료, 유모차를 타고 온 어린이와 가족, 연인, 친구 등 다양한 참가자들은 복사꽃 길을 걸으며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출발지와 반곡지에서는 문화예술봉사단, 하모니카 연주단이 마련한 음악회가 열려 흥을 돋우었고, 행사장에 설치된 농산물 판매 부스에서는 신선한 지역 농산물을 저렴하게 판매했다. 꽃도 장관을 이루지만 복숭아는 지역 농가의 큰 소득원이다.
남산면의 4월은 무릉도원이다. 올해 반곡지 복사꽃 축제는 코로나 사태로 취소되었지만, 꽃은 여전히 아름답게 피고 있다. 홀린 듯 꽃길을 따라가 보니 또 다른 저수지, 호명지가 나타난다. 못을 만들 때 호랑이가 울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사면이 온통 복사꽃이다. 저수지 위쪽에는 공사가 진행되는데 안내판을 보니 ‘경산 에코토피아’ 건설 사업 중이라고 적혀있다. 수목원과 화훼 전시원, 농산물전시장, 생태학습관, 사계절 썰매장, 공연장과 휴식공간, 오토 캠핑장, 수목 산책로, 생태탐방로와 습지관찰로 등 새로운 놀이 공간이 들어선다.
남산면에는 쓰레기 매립장이 있다. 조성 당시 주민들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매립장으로 훼손된 토지와 휴경 농작지의 자연경관을 복원하고 환경시설에 대한 혐오 이미지 탈피를 위해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이 조성되고 있다.
퇴직 후 반곡지 아랫마을에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사는 초등 동기에게 연락하니 단숨에 달려 나왔다. 집으로 안내한 그는 옥상에서 반곡지 쪽을 바라보며 매일 변하는 모습을 화폭에 옮기고 싶단다. 친구들을 초대하여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여유시간을 즐기는 것이 기쁨이라고 한다. 복사꽃 피는 남산면은 쓰레기 매립장으로 인해 떠나는 곳이 아니라 다시 찾는 곳으로 바뀌는 중이다.
<글 / 천윤자 수필가>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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