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환성사에 가면...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일주문 팔각기둥의 위엄
해마다 봄이 오면 환성사에 간다. 수월루 앞 벚나무에 꽃이 피고, 느티나무에 연두색 새잎이 돋아나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다. 올해는 어쩌다가 때를 놓쳤다. 벚꽃은 졌지만,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풍경도 괜찮았다. 하양시장에서 조산천 상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새로 조성 중인 아파트 단지가 끝날 즈음에 바위에 환성사라 새긴 이정표가 보인다. 자칫하면 놓치고 지나간다. 오른쪽 무학산 골짜기로 계곡 옆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환성사가 있다. 환성사 가는 길에도 애기똥풀꽃과 아카시꽃, 찔레꽃에 송화(松花)까지 꽃구름이 피어난다. 하양 출신의 수필가 구활 선생은 “무학산 남향받이에 있는 환성사는 봄·가을 소풍의 단골 메뉴였고, 소풍길엔 뒤축이 떨어진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가다 너무 속이 상해 몇 번이나 눈물을 찔끔거린 기억(〈여인의 몸〉에서)”의 공간이라고 회상한다.
▲ 환성사
환성사는 신라 흥덕왕 10년(835년) 심지왕사가 창건하였으나, 고려말에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다.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환성사에는 대웅전, 심검당, 요사채, 수월관, 산령각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1971년 보물 제562호로 지정되었고, 부속건물 심검당은 1975년 지방문화재 84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환성사는 늘 고요하고 적요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으로 향한다. 이십여 년 전 처음 환성사를 방문했을 때는 폐사지에 가까웠다. 넓은 절터에 일주문의 네 기둥만 덩그러니 있었다. 팔각의 화강암 기둥은 영화로웠던 한 시절의 흔적이었다. 게다가 낡은 수월루 앞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벚꽃이라니! 그 아이러니한 풍경은 환성사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 환성사 일주문
일주문은 속(俗)과 성(聖)의 경계를 가르는 문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까지 이어진다. 이 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법계(法界)로 들어가는 셈이다. 환성사 일주문은 특이하다. 네 개의 돌기둥이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양 끝의 두 기둥은 사각이나 가운데 두 개는 팔각이다. 보통 절집의 일주문은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굵은 소나무 기둥을 세운다. 그 안에 수문장인 사천왕을 세워 위엄을 과시한다. 그런데 환성사 일주문은 사각과 팔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기둥에 지붕만 얹었다. 화재에 대비한 방책이었는지, 누군가의 넉넉한 시주로 화강암 팔각기둥을 세웠는지 속사정은 알 수 없다. 아무튼 일주문의 팔각기둥은 사천왕보다 더 위엄 있게 환성사를 수호하고 있다.
▲ 환성사 수월루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용연(龍淵)이 있고, 돌계단 중간쯤에 큰 바위와 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에 나무를 심지는 않는다. 절집이 퇴락하면서 누군가가 벚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었던 듯싶다. 하늘을 향해 자란 나무는 죄가 없으나, 그 나무를 심은 인간에게는 죄를 물어야 한다. 계단이 끝날 무렵 눈앞에 훤칠한 수월루(水月樓)가 나타난다. 담장 양쪽에 연미색 불두화가 활짝 피어 나그네를 반긴다. 최근 수리를 하고 새로 단청을 입힌 수월루와 대웅전이 말끔하게 단장했다.
환성사(環城寺)란 이름처럼 절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성(城)처럼 안온하다. 앞산을 보면 연꽃 봉우리가 피어나는 듯 산세가 아름답다. 뒤로는 무학산인데, 산을 넘으면 불굴사가 나온다. 남쪽이라 햇볕도 잘 들고 산세가 험하지 않다. 절이 자리한 곳은 어디든 명당이지만, 대웅전 앞뜰에 서서 심지왕사가 왜 이 자리에 환성사를 창건했는지 생각해본다.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바람과 물길, 해와 달의 길까지 고려한 선택이었으리라. 무학산은 환성사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보았으리라. 산이 있으니 절집이 들어섰겠지만, 천 년이 넘도록 사이좋게 동행하고 있다.
2. 수월루에 달이 뜨면
▲ 수월루
환성사 수월루(水月樓)는 미스코리아급이다. 인물이 훤칠하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누각인데, 양 측면만 나무로 가리고 앞뒤가 트여 있다. 유명한 절집을 꽤 다녀보았으나 수월루 만한 인물도 드물지 싶다. 땅의 경사를 이용하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자리에 앉힌 안목도 안목이지만, 팔작지붕에 살짝 올린 추녀가 멋스럽다. 무엇보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보는 수월루의 차경(借耕)은 압권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건너편 벚나무에 연분홍 벚꽃이 피면 누구인들 마음이 동하지 않으랴. 수행자가 머무는 절집치고는 봄날의 풍경이 지나치게 화사하다.
▲ 수월루 앞 용연
보름달이 뜨는 밤, 수월루에 올라가면 두 개의 달이 뜬다. 하늘의 달과 수월루 앞 연못의 달, 수월루(水月樓)라는 이름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겠다. 수월루 앞 연못에 얽힌 전설이 흥미롭다. 대선사가 일주문을 세우고 대웅전 앞에 연못을 파 용연(龍淵)이라 했다. 그는 만약 이 못을 메우면 절이 쇠락할 것이라 예언했다. 절이 날로 번창하여 수백 명의 신도와 객승들이 찾아오니 뒤치다꺼리로 엄청난 쌀을 소비했다. 어느 해 게으른 주지승이 부임하는데, 그는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귀찮게 여겼다. 주지가 불만을 토로하자 객승이 비방을 알려주었다. 용연을 메우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처방을 내렸고, 주지는 그의 말을 듣고 곧장 연못을 메워버렸다. 연못을 메우자 절은 불에 타버리고 그 용연에서 황금송아지가 솟아오르더니 동화사 쪽으로 날아갔다. 이 사건 후 찾아오는 신도도 줄어들고 절도 쇠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전설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 황금송아지는 배금주의에 물든 타락한 절집을 상징한다. 아울러 중생구제를 외면한 절집은 망한다는 교훈도 내포하고 있다. 밥이라도 많이 지어 보시를 했더라면 그리 허망하게 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퇴락한 절집의 풍경은 쓸쓸하고 고적하다. 넓은 절터에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뒤흔든다. 절집도 생노병사의 윤회는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복원한 용연의 물은 흐르지 못해 누렇고, 주변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래도 보름달이 뜨는 날, 수월루 누각에 서서 밤하늘의 달과 용연에 비친 달빛을 보고 싶다.
▲ 대웅전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이다. 수미단은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단이다. 사진촬영을 요청했으나 주지스님은 재산권을 내세워 거절했다. 사진으로 보니 채색이 화려하다. 맞뚫림 기법으로 새긴 조각상들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대웅전 마당의 삼층석탑은 기단석만 옛것이고 탑신과 옥개석은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그래도 대웅전 마당에 무너진 석탑의 잔해만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 석탑도 세월이 흐르면 이끼가 끼고 석화가 피어 날 테니까.
요사채 앞 바위에 보호 펜스가 쳐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석조인데,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바닥에 밭이랑 같은 홈이 파져 있다. 설명에 따르면 한지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를 삶아 씻던 수조라고 추측한다. 아마 무학산의 닥나무를 채취해 풍부한 수량을 이용해서 닥종이를 만들었던 듯싶다.
▲ 부토밭
내려오는 길에 부도밭에 들른다. 부도밭은 절집의 역사와 자부심이 깃든 공간이다. 고승들이 열반하면 사리를 모아 부도탑에 모셨다. 시대별로 모양을 조금씩 달리하는 부도탑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부도밭에는 바람에 쓰러진 수양벚나무의 분홍꽃잎이 낭자하다. 죽음의 공간인 부도밭과 연분홍 벚꽃잎의 잔해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부도탑과 꽃잎은 소멸과 생명을 상징하지만, 이 둘은 윤회의 고리 안에서 연결되는지도 모른다. 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일주문 앞에 섰다.
3. 환성사 전설과 시(詩)
대구의 시인 장옥관은 환성사를 다녀간 후 〈환성사에 가다〉라는 시를 남겼다.
다 저문 봄날의 환성사는 이미 구름의 일이다
그날 붉은 육질의 시간 뚫고
도망치듯 찾아간 하양읍 왁자한 시장바닥
푸줏간 주인은 냉동실 갈고리에 절을 매달아 놓고
뚝뚝 피 흘리는 고기를 斤으로 베어 팔았다
고기… 물고기의 수미단이
환성사에 있다는 것이다
연밥 따먹는 자라와 매화가지 옮겨 앉는 가릉빈가*
그때 불두화가 숨긴 부도나 당간지주는
거친 살갗의 화강암이다 굵은 팔뚝 속으로
와글대는 악머구리들은 서쪽에서만 운다, 울어
그치지 않는 물소리 미루나무 귀가 한층 얇아지고
날은 빠르게 어두워져 별들의 간격은
더 한층 넓어지는 것이다
날벌레들의 욕망이 채색의 단청으로 달라붙어
도무지 감춰지지 않는 지독한 살 냄새
뼈가 다 보이도록 꽃살무늬 환하게 번져 나오는
불빛과 또 저기 웅크린 짐승
*가릉빈가 : 경전에 나오는 상상의 새로 목소리가 특히 아름답다.
시인은 늦은 봄날에 환성사를 답사하고 하양시장 고기집에 간 모양이다. 붉은 육질의 시간과 푸주간의 피 흘리는 고기가 색채 이미지로 연결되고, 그 고기는 또 대웅전 수미단의 물고기, 자라와 가릉빈가로 이어진다. 수미단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본 모양이다. 와글대는 악머구리와 그치지 않는 물소리, 날벌레들의 욕망과 화려한 단청은 혼란스럽고 현란하다. 고기 굽는 냄새와 환한 불빛, 웅크린 짐승은 절집이 불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수도도량인 절집과 붉은 피가 흐르는 푸주간은 파멸을 상징하는 전주곡이다. 환성사에서 본 유물들과 자연물, 전설의 이미지가 연쇄작용을 하면서 마치 굿판을 보는 듯하다. 시인의 상상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환성사의 전설과 퇴락은 시인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니 그리 안타까운 일은 아닌 듯싶다. 절집의 본분을 망각한 황금송아지의 탈주는 패망의 전조였다. 법계를 위반한 스님의 업보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황금송아지와 주지스님은 사라졌지만, 전설에 담긴 중생들의 한(恨)은 아직도 살아 전해온다. 환성사는 조금씩 복원 중이다. 예전의 영화스러운 시절로 되돌아가지 못한들 어떠랴. 대웅전 마당에 서서 수월루가 연출하는 멋진 차경만 보아도 충분하다. 보름달이 뜨는 날, 수월루에 앉아 벗들과 맑은 차 한 잔 나누어도 좋으리. 해마다 봄이 오면 수월루 앞 벚나무에는 화사한 꽃들이 피어날 테고, 나는 또 환성사로 꽃구경을 갈 것이다.
<글 / 이운경(이경희)>
<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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