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족 생 활 편/나 의 글 방

(수필) - 너도 친구다

무철 양재완 2018. 11. 26. 09:45




 


너도 친구다

          양 재 완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관포지교(管鮑之交), 죽마고우(竹馬故友), 막역지우(莫逆之友)와 같이 친구의 종류도 여러 형태로 분류된다. 나의 친구들을 위와 같이 분류한다면 어디에 속할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제까지 만나 보지 못한 사람과 첫인사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서로 서먹서먹하지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출신학교나 태어난 동네가 서로 맞아떨어지면 금방 친구처럼 대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술이 중신아비가 되어 친해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술이 약간씩 들어가 기분이 좋아지면 잃어버렸던 형제를 긴 항해 끝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이것은 술이 가진 보이지 않는 친화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와 나의 술친구들은 맥주나 소주를 주로 마시고 가끔 막걸리를 마시는 친구도 있다. 체면 차릴 필요가 없는 막연한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는 세 가지 술이 다 나온다. 소주, 막걸리, 맥주를 각자 취향에 맞추어 먹을 수 있는 편한 자리가 된다. 처음에는 일상 이야기로 시작하여 분위기가 평화롭게 진행된다. 그러다 술 먹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독재자가 나타난다. 특히 소주와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제조해 마시는 술꾼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은 술을 마시기를 강요한다. 술이 술 먹는다고 그때쯤 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활력이 넘치는 무정부 상태로 이어진다. 밑도 끝도 없는 분위기에 시간 개념은 점점 엷어져 간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술친구들은 술자리가 무르익게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진다.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좋아하는 부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셔야 되는 날에는 아무리 늦더라도 지하철 막차로 집에 도착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다, 늦게 들어가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궁색한 변명을 할 때도 생긴다. 아내는 남편이 과음으로 속을 다칠까 봐 걱정이라며 옐로카드를 한 장씩 던지곤 한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오래되어서인지, 아니면 술주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으니 벌칙치고는 유순한 편이다. 아내가 요란스레 바가지를 긁지 않으니 귀가 시간이 더 느슨해지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연말이 되면, 나는 왠지 술을 더 먹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인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혼자 다 감당이라도 해야 하는 듯이. 그전 해보다는 줄었다지만 작년에도 그랬다.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자주 보아야 할 친구를 자주 못 본 경우에도 채권자에게 빚이라도 갚듯이 친구를 불러내어 한잔했다. 송년회와 모임의 정기총회도 12월에 몰려 있었다. 특히 모임의 총무를 맡은 곳이 여럿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술 먹는 기회가 많아졌다. 12월 한 달 동안 친구 좋다, 술 좋다 하며 저녁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연일 마시는 술로 인하여 몸이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연말에는 결국 악성 감기에 걸려 외출을 삼가게 되었다. 혹사당한 내 몸에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간혹 여름에도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있지만, 감기의 전성기는 겨울의 꼭짓점인 연말 즈음이다. 특히 지난해 겨울의 감기는 매우 지독해서 걸렸던 사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악성 감기였다. 감기에 걸린 사람과 전화로 이야기를 해 봐도 이번만큼 지독한 감기는 처음이라 했다. 평소에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는 나로선 건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져 어지간한 병은 그냥 견디는 편이다. 감기가 처음 왔을 때 며칠은 습관처럼 그냥 견뎌 보았지만 결국에는 병원과 약국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감기는 한문으로 感氣라 하여 몸에 기운이 빠지면 잘 걸린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는데, 싸돌아다니는 나의 몸에 기운 빠진 걸 용케도 알아차린 것이었다.

자주 아프지 않던 사람이 어쩌다 탈이 나면 오래 간다고 했다. 자연적으로 모임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생겼고, 모임에 가서 술잔을 사양하는 겸손도 생겼다. 술잔 건네는 친구도 오는 술잔 마다하지 않던 나를, 처음에는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보다가 감기 때문에 사양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 권하지 않았다. 그 당시 감기가 워낙 지독하다고 소문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가 술을 먹지 않으려 해도 막무가내로 술잔을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세월도 많이 흘렀고 본인 몸들도 쇠약해졌음인지 억지로 술잔을 돌리려 하지 않는 것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술 즐기는 사람이 술잔을 받아놓고 제사상의 술잔 쳐다보듯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연히 술자리가 재미없어지고, 술 먹는 재미가 없어지니 세상사는 재미까지 멀어져 갔다.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다. 여행과 사진을 취미생활로 하는 나에겐 산천초목이 친구가 되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친구이며, 야산에 홀로 서 있는 노송도 나에게는 위로가 되는 친구다. 여기에 더하여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감기도 이제는 친구로 끼워주기로 했다. 건강에 너무 자신감을 가져 자칫 더 큰 화()를 불러 올 수도 있을 즈음에 한 번씩 브레이크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술을 즐기는 나에게 일정기간 술을 멀리하고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속담에 감기 고뿔도 남은 안 준다.’는 말이 있다. 지극히 인색한 사람을 두고 빗대어하는 말이지만 어느 구석엔가 감기도 쓸모가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했듯이 오는 감기를 좋은 뜻으로 받아들인다. ()으로 고생하는 환자에게 의사는 암을 친구로 생각하고 함께 데리고 살아라한다.

하지만 친구야, 고맙다는 인사에 너무 감격하여 자주 오지는 말아라. 혜민스님도 가장 친한 친구와 일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보니 서로의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헤어졌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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