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현장, 평산동 코발트광산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 영령들이시여! 이제 부디 편히 잠드소서
음력 9월 9일, 산과 들에 풍성하게 피어있는 국화로 술을 빚거나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는 중양절, 아름다운 풍광과 재미난 이야기를 찾아 나선 길이 아니라 아픈 역사의 현장 답사에 나섰다. 합동위령제가 열리는 곳으로 향하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경산코발트광산 위령탑 일원
오른쪽으로 백자산을 두고 확 뚫린 도로를 달리면 전원주택 ‘샤갈의마을’이 보이고 아래로 코발트광산 안내판이 눈에 띈다. 안내판을 따라 작은 길로 들어서 요양원 가는 길과 갈라져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위령탑이 보인다.
“아버지! 1950년 경인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플래카드만 바람에 흔들린다. 나무 데크로 만든 길을 따라 내려가 본 수평2굴의 철문도 굳게 닫혀있다.
▲ 제71주기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희생자 합동 위령제
오후 2시에 열기로 한 이날 71주기 위령제는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2시간 앞당겨 유족회 임원 10여 명만 참석해 고유제를 지내고 돌아간 뒤였다. 며칠 후 답사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하기로 했다.
경산마을학교 활동가와 학생들로 구성된 답사팀과 동행했다. 일찍 현장에 도착하여 기다렸다. 위령탑 앞에 준비한 과일과 술을 차려놓고 추모의 예를 올린 후 유족회 이사의 안내로 수평1굴과 수직1. 2굴로 향하는 일행을 뒤따라 갔다. 수풀을 헤치며 찾아가니 갈림길에서 보았던 요양원 건물 바로 뒤쪽이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사유지라 둘러 간 것이다. 수평1굴은 사유지에 있어 볼 수 없다고 한다. 다시 산길을 따라 수직굴에 이르니 추락 위험성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철망 사이로 보이는 수직굴
안내자가 열어준 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덮어둔 철망 사이로 내려다본 수직굴은 아득하다. 출입통제와 안전장치가 없다면 실정을 모르는 등산객들이 굴러떨어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현장, 한때는 취기 어린 젊은이들이 담력 시험하거나 유령체험을 위해 찾은 곳이었다니 가슴이 먹먹하다. 수직굴에서 내려오는 길 곳곳에 핀 쑥부쟁이가 사연을 아는지 불어오는 바람에 연신 고개를 돌린다.
▲ 수평2굴
들어가 볼 수 없는 수직굴과는 달리 수평2굴은 안으로 들어가 둘러 볼 수 있단다. 안전모를 쓰고 물이 흐르는 나무판 길을 따라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니 꽤 길게 이어진다. 한참 만에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한쪽은 채광을 위한 곳이고 한쪽은 운반을 위한 길인듯하다. 운반을 위한 길은 수직굴로 이어져 위로 연결되는 듯한데 더는 발굴이 되지 않아 막혀있다. 천장에는 아름다운 종유석은 보이지 않고 영령들의 슬픈 원혼이 달린듯하다.
◆ 3천500여 명 민간인이 학살된 평산동 코발트광산
▲ 경산코발트광산 위령탑
경산 평산동 코발트광산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개발한 식민지 수탈의 현장이다. 연혁을 살펴보니 1937년 춘길광업소로 문을 열어 1944년 보국코발트광업회사로 변경, 일본군수회사로 지정됐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들미광산으로 불렀는데 채광이 한창 진행될 때는 평산동에 광산촌이 형성되었고, 점촌동에는 관사가 줄을 이었다. 이곳에서 채광한 코발트를 상방동 선광장에서 작업하여 경산역을 통해 옮겼다. 해방 직전, 일본이 철수하면서 문을 닫고 방치되어 오다 6.25 전쟁 중에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 현장이 되었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경부터 9월 20일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갱내 수평굴과 수직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고, 인근 대원골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갱도 위쪽은 현재 인터불고경산CC 골프장이다. 학살의 현장이었던 대원골은 골프장 아래 영원히 묻혀버렸고, 유족들의 요청으로 지금 남아있는 현장이 겨우 보존되고 있다.
▲ 수평굴 한쪽에 놓인 추모 화분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이다.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7~8명씩 밧줄로 손발이 묶여 수직갱도 앞에 세워지고 총격을 받았다. 죽거나 부상으로 중심을 잃고 수직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 일부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심지어 발굴과정에서 76mm 폭탄까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했다.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갱도를 빠져나온 3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은 숨어 있다가 굶어 죽고, 한 명은 다시 발견되어 총살되고, 마지막 한 사람이 점촌 옹기굴에 숨어 생명을 부지하고 증언하여 그날의 참상이 알려졌다.
◆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 판정
▲ 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유해
코발트광산 사건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0년 5월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유족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강제 해산당했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쇠망치로 위령탑을 망가뜨렸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안내 표지판
그로부터 40년,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민간인학살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0년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2005년, 특별법이 제정됐고, 이 법에 따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가 설치되어 2006년 4월 25일 정부 주도로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3년간 수많은 유해가 쏟아졌다. 수장되고 생매장된 유해들이 드러나면서 땅속에 묻혔던 진실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9년 11월 1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이라고 판정했다. 전체 희생자 수는 1,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희생자의 수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 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 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라고 덧붙였다.
▲ 수평1호굴에서 발굴된 유해 모습
사법부도 이러한 국가기관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였고 국가는 배 보상에 들어갔다. 2014년 2심 승소에 이어 다시 2016년 대법원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이로써 그동안 코발트광산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이 주장한 억울한 희생이 국가기관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60여 년 동안의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적은 금액이지만, 국가가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컸다.
▲ 지난 2019년 6월 세종시 추모의 집으로 옮겨지는 코발트광산 유해들~
하지만 이후 수습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수습된 유해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고, 2013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갱도 입구가 안전장치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2013년 위령 공원과 탑, 관람 데크 등이 조성되었고, 2016년 유족회가 비를 세우고 위령탑과 주변 시설이 정비되었다. 입구는 철문으로 폐쇄하고 CCTV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현재 422구의 유해가 세종시 추모의 집에 모셔져 있다.
지난해부터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이 재개되고 진실규명 신청·접수 등 업무가 추진되면서 경산에서 60여 명이 신청하고 최근 1차 조사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희생자 찾아야 할 때
▲ 철장으로 통제되고 있는 수직굴 입구
정부 추산 2천여 명, 유족회와 언론, 시민단체가 추정하는 희생자가 무려 3천500명에 이르는 평산동 코발트광산과 대원골, 그러나 위령탑에는 160여 명의 희생자 이름만 새겨져 있다. 지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6차례의 유해발굴과정에서 수습된 유해만 500여 구에 이르는데 왜 이렇게 적은 숫자의 희생자 명단만 적혀있냐고 물어보니 유가족들을 철저하게 입막음하고 탄압해온 연좌제 때문이라고 한다. 유족들은 그동안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직업선택의 자유조차 빼앗긴 채 한 맺힌 삶을 살아왔다. 90년대 중반까지 유가족들은 고위 공무원이 되기 어려웠고, 해외 유학도 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4·19 직후 유족회를 결성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해 왔는데, 가까스로 조성한 위령탑이 군사쿠데타로 해체되고 유족회 간부들이 투옥되면서 지난 40년간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암흑 같은 세월을 살아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정부를 믿을 수 없었다. 2005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한 사람은 128명, 그나마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는 109명만 참가했다. 그들이 적은 금액이라도 보상받았기에 그나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도 60여 명이 신고했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희생자를 찾아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 추모공원 조성으로 역사 교육의 장이 되길
▲ 위령탑 입구에 설치된 추모시와 미술작품
국제무역항 군산을 여행하면서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군산의 역사, 수탈의 현장,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 등 1930년대 군산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물류유통 중심지가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현장이 되었지만, 지금은 산업단지 조성과 새만금 개발 사업을 통해 세계물류유통의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 지금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 위령탑 인근 컨테이너에 진열된 유해 발굴 사진들~
이곳 코발트광산에도 해마다 찾아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골프장 조성으로 현장이 많이 훼손되고 사유지로 접근이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보존하고 근대역사관과 평화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 땅에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과 교육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이곳에서 반전 평화축제라도 열리면 더욱 좋겠다. 이날 답사를 함께했던 경산마을학교 대학생 활동가와 어린 학생들이 홍보물을 만들며 홍보대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보면서 작은 희망의 싹이 움트는 것 같았다.
<글 / 천윤자 수필가>
< 사진 / 무철 양재완>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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