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포고택(蘭圃故宅)에 가을이 깃들면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 용성면 곡란리 난포고택
1. 경산에서 귀한 조선시대 고택
난포고택으로 향하는 국도변에 가을이 무르익는다. 자인시장 네거리를 지나 용성으로 향하면 들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가을 들판은 풍요롭다. 누렇게 익어 수확을 앞둔 벼와 포도와 대추가 알알이 영근 수확의 계절이다. 용성 우회도로를 지나 청도 운문을 향하는 국도로 접어든다. 오른쪽을 보면 삼각형의 용산(龍山)이 보인다. 그 산자락에 자리한 마을이 곡란리(谷蘭理)이다. 마을 이름이 고아하다. 란(蘭)이 자라는 골짜기였으니 난향이 그득했으리라.
마을 앞 작은 숲에 마련한 쉼터가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과일 바구니가 옹기종기 놓인 난전은 무인가게이다. 동네 할머니가 농사지은 먹거리를 계절 따라 내놓는다. 밭에서 키운 채소부터 과일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느리게 가다보면 왼쪽으로 고목들 사이로 기와집이 보인다. 그냥 기와집이 아니다. 솟을대문이 있고 수려한 사랑채가 있는 고택이다. 난포고택(蘭圃故宅)이다.
경산시에서 현존하는 조선시대 민가고택으로는 유일하다. 평지에 다소곳하게 자리하여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1990년대 후반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지역 신문사에서 개최하는 ‘경산 문화유적 답사’에 나섰다. 가을이 무르익는 휴일에 일행은 난포고택을 방문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할머니께서 답사객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할머니는 고택의 안주인으로서 후덕하고 인정이 많으셨다. 질문에 대답도 잘 해주시고, 곶감도 내놓으셨다. 17대 종손 최원규 씨에 의하면 할머니는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때는 사랑채도 복원되지 않았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 있었다. 오래된 우물과 장독대, 뒤뜰의 고인돌, 눈썹처마 등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두이(二)자처럼 나란히 배치한 안채
난포고택의 건축학적 가치는 조선 중기 경상도 양반 민가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미음자형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를 두이(二)자처럼 나란히 배치했다. 안채를 개방형으로 설계했다. 아마도 지형을 고려하고, 풍수지리의 원리를 따라 그리 지은 듯하다. 안방 뒷벽에 다락이 있고, 대청마루에도 문짝을 달았다. 추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 안채의 눈썹처마(오른쪽 지붕의 처마)
안채 맞배지붕의 끝을 장식하는 눈썹처마는 난포고택의 백미이다. 사람의 눈썹을 닮아 눈썹처마라 부르는데, 들이치는 비도 막고 태양열도 가리기 위한 장치이다. 난포고택에서 본 눈썹처마는 한옥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인 정침·행랑채·사당 중 사당의 모습
난포고택은 난포 최철견(崔鐵堅)이 명종 원년(1545)에 지은 집이다.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 방아실, 행랑채와 사당 등이 고루 갖추어진 조선후기 전형적 양반집이었다. 사랑채가 두 채인 것만 보아도 이 집의 경제력과 살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재실 수오당은 최근에 용산(龍山)에서 이건하였다. ‘가경 14년’(1809)이라고 새겨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어 순조 9년(1809)에 집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난포는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70고령에 의병을 일으켰다. 손자 최인수(崔仁壽), 증손자 최준립(崔竣立)과 함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의병과 합세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킨 난포의 정신은 기려 마땅하리라.
이 집은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난포공실기(蘭圃公實記)』에 전한다. 고택을 보존하는 것은 선대의 인덕과 후손의 정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난포고택은 1975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2. 난포고택을 지키는 사람들
난포의 17대손 최원규 씨는 곡란리로 귀농하여 고택을 지키며 곡란리 이장을 맡고 있다. 그는 ‘밤가시농원’을 운영 중이며, 과수원에는 복숭아, 살구, 옻나무, 헛개나무 등을 재배하고 있다. 최원규 씨는 객지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나, 몇 년 전에 아버지의 안태 고향 곡란리로 귀촌했다. 마당의 우물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난다. 우물의 물은 허드렛물로 쓴다고 한다. 이 집의 장맛을 이어온 장독대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안채 뒷뜰과 고인돌(배롱나무 아래에 있는 돌)
고택 안채 뒤뜰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큰 고인돌이 있다. 산과 내를 끼고 있는 곡란리에는 들판에 고인돌이 많았다고 한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고인돌을 들어내거나 땅 깊숙이 묻어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그 고인돌은 고택 뒤뜰에 자리하여 오늘날까지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난포고택의 고인돌은 사당의 조상들과 함께 난포고택을 지키는 수호신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손자가 태어나거나 아이가 아플 때마다 고인돌에 정안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으리라. 할머니가 계실 때는 위패를 모신 사당도 구경할 수 있었다.
▲ 난포고택 은행나무
나는 운문댐 쪽으로 오가는 길에 봄가을이면 난포고택에 들렀다. 고택 앞마당의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에 단풍이 들면 차를 세우게 된다. 그날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가니 안채 부엌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다. 집안 며느리들이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듯했다. 인사를 드리고 집 구경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말하니 흔쾌히 허락했다. 기분이 좋았다. 집주인 입장에서 보면 낯선 방문객이 성가실 법도 한데, 난포고택 주인들은 항상 방문객을 환대해 주었다. 그래서 난포고택은 내게 따스하고 친절한 공간으로 남아있다.
▲ 흙으로 빚은 할머니 조각상
안채 뜰에는 흙으로 빚은 조각상이 있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손자와 곤히 잠든 손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긴 할머니의 모습이다. 정겹고 포근하고 아득하다. 조손(祖孫)간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이다. 최 이장의 사촌 여동생이 미대를 나와 조각을 하는데,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만들었단다. 이 조각상의 할머니가 내가 만났던 그 할머니란다. 눈썹처마 밑에 자리한 조각상이 잘 어울린다. 난포고택의 후손들은 이 집을 지키고 역사를 이어온 할머니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 제사라는 의례를 통한 기억의 방법도 있으나, 조각상으로 할머니와의 추억을 재현한 것도 괜찮았다.
▲ 난포고택의 이모저모
고택(古宅)은 단순히 연식이 오래된 집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야 가치가 더해진다. 아울러 집과 함께 세월의 풍파를 겪은 고목들, 우물과 댓돌과 기와까지 그 집을 둘러싼 생명체와 무생물들의 총합체가 아닐까. 이름난 고택에 가보면 집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쓸쓸하고 스산하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집은 사물에 불과하다. 난포고택은 다행히 집을 비우지 않고 후손이 지켜오고 있다. 그래서 온기가 돈다.
▲ 난포고택의 솟을대문과 담장의 능소화
봄에는 느티나무에서 또는 연두빛 새순이, 여름에는 주홍빛 능소화가,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아름다운 난포고택. 특히 사당 앞의 배롱나무는 이 집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이다. 안채 뒤뜰에 있던 오래된 감나무는 수년 전 태풍에 쓰러져 명(命)을 다했다. 고택을 지은 의병장 난포 최철견의 충절과 선비정신, 안채 뒤뜰에서 이 집을 지켜온 고인돌, 뜨락의 모자상 조각 등은 난포고택을 떠받치는 유무형의 자산이다. 오백년 배롱나무와 솟을대문 담장의 능소화가 피는 내년 여름에 다시 난포고택을 찾아가야겠다.
<글 / 이운경(이경희)>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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