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 등 산 편/경산곡곡스토리텔링

경산곡곡 스토리텔링에 사진을 싣다 - 30(영남대 민속촌과 러브로드)(경산인터넷뉴스)

무철 양재완 2021. 11. 29. 16:34

영남대 민속촌과 러브로드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대학 내 넓은 야외박물관, 민속촌

▲ 영남대 민속촌

캠퍼스는 온통 가을빛이다. 걷기를 작정하고 나섰으니 멀찍이 삼천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공대 앞을 지나치는데 지난봄 조용하던 학교는 이제 학생들로 활기를 찾은 듯하다. 법학전문 대학원 앞에 이르니 솔숲 사이로 보이는 민속촌, 입구를 지키고 있는 장승이 반갑게 나를 맞는다. ‘천하영남대장군’, ‘지하영남대장군’. 천마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는 장승은 영남대 조소과를 졸업한 김진식 대목수가 모교를 위해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장승을 지나면 만나는 서원, 정자, 옛집과 우물, 전통놀이마당, 서당, 고분군 등 안동댐 건설 수몰 지역과 경주, 칠곡에서 이전 복원한 건물들이 나즈막한 야산을 끼고 있어서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마을처럼 자연스럽다.

▲ 구계서원

구계서원(龜溪書院) 마당은 온통 은행잎으로 덮여있다.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동재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황금빛 은행잎이 가을의 심장 같다던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역동 우탁(易東 禹倬)선생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서원인데, 안동군 월곡면에 있던 것을 댐이 건설되면서 1975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이건 당시에는 강당인 독역재(讀易齋)밖에 없었으나, 2000 11월에 모현사(慕賢祠), 내삼문(內三門), 일신재(日新齋), 시습재(時習齋), 진덕문(進德門)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일휴당

협문으로 나오니 솔숲 너머 쌍송정(雙松亭) 뜰의 소나무가 유난히 돋보인다. 금혜 선생이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본가 옆에 서재로 지은 별당으로 용트림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 즐겼다고 한다. 소나무도 옮겨왔는지, 소나무가 있는 곳에 정자를 앉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뜰에도 소나무, 담장 밖도 솔숲이다. 일휴당(日休堂)은 금응협 선생이 제자를 교육하기 위해 지은 별당으로 안동 예안면이 수몰되면서 옮겨왔다.

▲ 의인정사

56칸 전형적인 안동 양반집, 의인정사(宜仁精舍)는 ㅁ자형이다. 사랑채는 밖으로 개방되었고, 안채는 중문으로 막아 여성 공간으로 만들었다. 안채 부엌 뒤쪽으로 찬모방과 디딜방앗간이, 대문 옆에는 행랑채가 있다. 댓돌 위에 한 켤레 신발이 놓인 행랑채를 조심스레 기웃거리다 인기척에 뒤로 돌아 나온다.

안동을 여행하면서 수몰 지구에서 옮긴 한옥 고가들로 형성된 군자마을에서 하룻밤 지낸 적이 있다. 댐 건설로 고향을 떠났던 안동 출신의 벗은 수몰 전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 외내마을의 일휴당 금응협, 면진재 금응훈 형제가 광산김씨 외사촌 5종반과 함께 칠군자로 통해 외내마을이 지금까지 '군자리'로 불린다고 했다. 군자마을 조성 때 일휴당 건물은 함께 가지 못하고 영남대로 이건하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수몰 당시, 문화재 이전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서 안동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의인정사도 같은 이유로 안동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모인 집들도 모두 제 터전을 떠난 실향의 아픔을 안고 있다.

▲ 까치구멍집

펼쳐진 논 건너편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까치구멍집이 보인다. 노랗게 새로 단장한 용마루 양쪽이 까치둥지처럼 생겼다. 경북 북부 산간지방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집으로 안방과 사랑방 부엌뿐만 아니라 마구간도 집 안쪽에서 추위를 피한다. 겨울철 난방 열을 이용해 가축을 보호했으니 가축도 식구로 온전히 대접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 화산서당

구계서원과 의인정사, 까치구멍집은 개방되어 있는데 일휴당과 쌍송정, 화산서당, 경주맞배집은 문이 잠겨있다. 강당과 대문채가 경북문화재자료 220호로 지정된 화산서당은 2009년 칠곡군 석적리에서 이건 복원했다. 만회당 장경우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이다.

▲ 경주맞배집

황룡사지 발굴과 함께 1976년 옮겨온 경주맞배집은 부엌, 안방, 대청, 건너방 순의 자형으로 어릴 적 시골 마을에서 자주 보던 집 같다. 담장 너머 들여다본 집에 두 그루 모과나무가 있다. 한껏 익은 모과가 주인 대신 집을 지킨다. 오랫동안 중병을 앓은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다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마친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을 기리는 의성김씨 정려문(旌閭門)도 보인다. 한때는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을 정려문이 낯선 이들의 발길만 오가는 길목에 애처롭게 서 있다. 길을 따라가니 봉분이 없는 경주 인왕동 고분군 복원지로 이어진다. 산자의 집과 죽은 자의 집터가 멀지 않게 이웃한다.

 러브로드를 걷다.

▲ 영남대 러브로드

민속촌과 법학전문대학원 사이 벚나무가 있는 흙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러브로드.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길이다. 봄이면 벚나무 아래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 학생들은 물론 지역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은 야산과 연결되어 철학자의 길, 사색의 길로 이어져 산책하기 좋다.

 

수년 전 어느 비 오는 봄날, 이곳에서 만난 한 가족의 뒷모습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일간지에 소개했던 사진과 글을 찾아보았다.

 

종일 비가 내린 주말 영남대 경산캠퍼스,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진 산책로를 한 가족이 걷고 있습니다. 꽃잎이 떨어져 눈처럼 쌓여 있는 꽃길입니다. 아빠 등에 업힌 아기는 잠이 들었나 봅니다. 아기가 비에 젖을까 봐 아빠 우산은 자꾸 뒤쪽으로 기웁니다. 엄마 손을 잡은 꼬마의 장화 신은 작은 발은 엄마·아빠 발걸음을 따라가느라 바쁩니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이야기가 빗속으로 스며듭니다. 봄꽃만큼이나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입니다. 이들 가족이 걸어가는 길이 쭉 꽃길이기를 기도해봅니다. <속삭이는 봄, 2013 4 10일 영남일보 게재>
 

▲ 벚꽃이 만개한 러브로드

그날 아이 엄마에게 사진을 찍고 싶다고 허락을 받았지만, 신문에서 가족의 모습을 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누구보다도 먼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연락처를 알 수 없어 알려 줄 수 없었다. 8년이나 지났으니 사진 속 아이들은 자라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었겠다. 지금 경산의 어디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그날 이후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이곳을 찾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고장을 점령하던 지난해 봄부터 주인이 오지 않는 대학의 넓은 야외박물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걸었다. 의인정사 사랑채 앞 미끈한 미녀 같은 목련이 촛불을 켜더니 봉오리를 맺은 안채의 매화가 피고 저수지 주변 수양버들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에도 연둣빛이 돌기 시작했다, 잔잔한 수면에는 은빛 윤슬이 반짝였다. 양지에 뽀얗게 쑥이 돋아나고 산수유나무가 온통 연노랑 물감을 칠했다. 이어 진달래가, 개나리가, 명자꽃이 다투어 피어나 화폭은 삼원색으로 변하더니 어느 사이 벚꽃이 팝콘처럼 망울을 터뜨리면서 세상이 환해졌다. 파란 하늘에 연분홍 꽃구름이 피어오르고, 꽃눈이 흩날리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습격에 우리가 모든 걸 멈춰버린 시간에도 하느님은 세상의 화폭에 자연의 색깔로 갖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 색깔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욕심내지 말라고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노력해야 다 같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고 귀띔한다.


이 가을에도 단풍잎은 봄꽃만큼이나 곱다.

 

遠上寒山石徑斜 (원상한산석경사)

白雲生處有人家 (백운생처유인가)

停車坐愛楓林晩 (정거좌애풍림만)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멀리 가을 산의 비스듬한 돌길을 오르니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인가가 있구나

수레를 멈추고 늦단풍 숲을 즐기노라니

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구나.

 

두목의 <산행>

 

어디 봄, 가을뿐이랴. 눈 덮인 마을과 녹음 짙은 여름, 사시사철 거닐고 싶은 곳이다


  박물관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 영남대 박물관 고인돌공원

발길은 저절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삶이 심드렁해지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 나는 자주 박물관 주변을 기웃거린다. 옛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고인돌, 석탑이 있는 야외전시장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실물 크기 모형의 광개토대왕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긴 시호가 영토를 확장하여 전성기를 이룬 고구려왕의 비석임을 알려준다. 4면에는 당시 유행하던 예서체로 1775자나 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기운차고 독특하여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서체다. 높이가 6m를 넘고,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한다니 실물을 보면 웅장함에 위압 당할 것 같다.


때마침 임당 발굴과 고고학의 세계 특별전이 열린다.

지배자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 관모, 신발에 눈길이 머문다. 갖가지 위세품은 녹이 슬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1600년 세월을 건너온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몇 조각 뼈로 남은 압독국 지배자, 복원한 그의 생전 모습을 보며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도 사죄와 반성 없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비난받는 한 사람, 장애를 가지고도 독서와 글쓰기로 자기를 성찰하며 성실하게 살다가 예순을 갓 넘어 심장마비로 갑자기 떠나버린 글벗. 비교되는 두 죽음이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동안 남편을 사랑해준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그의 아내가 부고했을 때 벗들은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빌었고, 소박하게나마 유고집을 만들어 주자고 했다. 그의 가는 길이 결코 초라하거나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글 / 천윤자 수필가>
<사진 / 무철 양재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