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구연정에서 바라본 무학산과 하양 시가지
“푸른 목장에 아침 햇빛 솟았네. 찬란한 이상을 가슴에 안고 진리의 상아탑 봉사의 길로...”
이 노랫말은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무학중·고등학교의 교가다. 노랫말에는 1960년대 하양지역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무학산을 개간하여 무학농장을 만들고, 궁극적인 빈곤퇴치를 위해서는 학교를 설립하여 도시로 유학 보내는 부담을 줄이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며 무학중·고등학교를 설립한 고 이임춘 교장 신부님(펠릭스)의 삶과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무학산은 신부님이 직접 지은 노랫말처럼 하양 근동의 주민들에게 푸른 목장에 솟은 아침 햇빛처럼 꿈과 희망을 선물한 거룩한 산이다.
▲초창기 무학농장 전경
또한 무학농장은 영국 명문가의 딸로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재원이 23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와서 일생을 한국의 사회복지를 위해 헌신한 양 수산나 선생님(Susannah Mary Younger, 이하 수지 선생님이라 칭함)의 숭고한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우리와 동시대에 거룩한 이타행(利他行)의 삶을 사신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현장인 무학산을 올라보자.
학이 날아올라 항상 하늘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무학산(舞鶴山)은 하양읍 대학리·교리·사기리와 와촌면 강학리에 걸쳐 있는 해발 588.4m의 하양읍 진산(鎭山)이다. 정상에서는 하양읍 시가지와 금호강 물줄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무학산 가는 길
오르는 길은 정상부 하단에 위치한 경산상엿집까지 도로가 나 있어 자동차로 쉽게 갈 수 있다. 이 길은 무학농장을 개간로 할 때 5.16 군사정부 군인들의 지원으로 개설됐다. 지금은 옛 무학농장 입구를 지나 환성사까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무학산 정상부는 남북으로 길게 지붕의 용마루처럼 뻗어있고 평탄하여 한때 화전민들의 터가 되기도 했고, 약 30만 평에 이르는 무학농장의 기반이 됐다.
정상에서 북면의 가파른 벽면을 내려가면 원효대사가 수도한 석굴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기도하며 마신 ‘아동제일약수’라는 약수터가 있는 신라대 고찰 불굴사가 나온다.
남동쪽으로 발달된 산기슭은 배산임수의 명당 조건을 갖춘 하양 고을의 터전이다. 교리에는 하양향교와 육영재(조선시대 인재 양성을 위해 건립된 지방교육기관, 경북도 기념물 제178호)가 있고, 금락리 부호리 일원에는 대구카톨릭대, 경일대, 호산대가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하양읍 대학리와 와촌면 소월리 일원에 대구경북자유경제구역 경산지식산업지구가 조성되고 있다.
무학산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무학산 푸른 목장의 아름다운 풍경, 무학농장과 수지 선생님, 무학산이 가진 문화적 가치에 대해 나의 기억과 생각을 적는다.
무학산, 푸른 목장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
무학산과 무학농장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가을의 아름다움이고 각별함이다.
무학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가을에 무학산에 올랐다. 아마 50년도 더 된 것 같다. 거의 매년 무학산에 올랐던 이유는 무학산 정상부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지가 있어서 가을이면 벌초나 성묘, 추수 후에는 묘사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7, 80년대 자가용이 없던 시절에는 집에서 무학산 정상까지 걸어서 갔다. 하양읍 대학리 용정마을에서 무학리(지금의 8919부대 자리)를 거쳐 무학산 정상까지 형님들은 제수를 지게에 지고 큰아버지 비롯한 어른들은 힌 두루마기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일렬로 산길을 올랐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성묘나 묘사에 자주 따라간 이유는, 처음으로 따라간 날 바라본 무학농장의 아름다운 풍경이 너무나 인상 깊었고, 아울러 토실토실한 알밤을 한 주머니 주워 오거나 떡을 챙겨 오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 3층으로 지어진 스코틀랜드 식 무학농장 축사
70년대 초중반, 어린 시절에 바라본 무학농장의 풍경은 매우 이국적이고 특별했다. 무학산 정상부 비탈에 조성된 광활한 초지에는 소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파아란 하늘과 맞닿은 산마루엔 억새들이 끝없이 펼쳐져 햇볕에 반짝였다.
검붉은 흙 이랑과 하얀 무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줄지어 선 무밭이 펼쳐져 있고, 드넓은 옥수수밭에는 어른 키보다 더 키가 큰 옥수수들이 갈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농장을 가로지르는 도로변에는 코스모스들이 무더기를 이루며 파란 하늘에 하양과 분홍으로 살랑대고 산 아래 펼쳐진 와촌 들녁은 온통 황금빛 물결이었다.
3층짜리 축사 등 이국적 목장건물과 어우러진 검푸른 옥수수밭과 목초지, 그 너머로 억새가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발아래로 펼쳐진 황금들판, 시원한 한 줄기 바람,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풍경, 빛의 대향연이었다.
목장 문을 닫은 이후로 목초지는 점차 억새밭으로 변했고, 청소년기의 나는 무학산과 무학농장이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워더링 하이츠’ 같다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솔밭길이 정겹고 아름다웠던 무학리 마을이 군부대 이전으로 소나무들이 모두 베어질 무렵부터 무학산과 무학농장의 억새밭은 잡목들로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 벽체만 남은 축사의 현재 모습
무학농장을 개간한 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농장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일부는 겨우 뼈대만 남은 상태다. 목초지는 거대한 잡목 숲으로 변했다.
지역민들의 가난과 영양실조를 구제하고자 무학농장을 개간하신 이임춘 신부님이 선종하신 지도 28년이 됐다. 자금을 지원했던 수지 선생님도 미수를 바라보는 연세다.
두 분 모두 내게는 각별한 은사님, 선생님인데 무너져가는 무학농장의 건물을 볼 때마다 두 분의 거룩한 삶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되살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무학농장과 수지 선생님
▲양수산나 선생님(Susannah Mary Younger)
수지 선생님은 1936년 런던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황실 가문,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명문 귀족 스튜와트 가문 출신으로 영국 외무차관과 노동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외삼촌과 사촌오빠 두 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블레스 오블리즈’ 가문의 후손이다.
▲ 수지 선생님의 어린 시절 모습과 저택(출처 : 가톨릭 빛 잡지)
특히, 사제도 없이 스스로 신앙심을 키워온 한국교회와 순교자들에게서 큰 감동과 경이로움을 느꼈고,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님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선교의 삶을 시작했다.
효성여대(대구카톨릭대 전신)에 피아노가 없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 등 친척들이 사용하던 피아노 7대를 싣고 1959년 12월 8일 아침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때 수지 선생님의 나이는 23세에 불과했다.
수지 선생님은 효성여대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면서 대구 생활을 시작했지만, 거리에서 구걸하는 배고픈 아이들이 많은 심각한 상황을 접하고는 1960년 대구 삼덕동에 ‘근로청소년의 집’을 설립하여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어머니 역할을 했다.
1962년에는 대구·경북 여성복지시설 제1호인 ‘가톨릭여자기술학원’을 설립하여 불우여성들에게 직업교육과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의 본격적인 사회사업을 시작하여 일생을 한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다.
초창기 수지 선생님은 이들 시설을 자신의 유산, 친구 및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마련하여 운영했다.
수지 선생님이 직업여성들의 재활을 위해 카톨릭여자기술학원 운영에 혼신을 다하고 있던 1964년 어느 날, 무학산을 개간해 농장을 조성하려던 하양천주교회 이임춘 신부님이 자금난으로 수지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지역민들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 신부님의 개간사업에 수지 선생님은 흔쾌히 동참했다.
수지 선생님은 영국 NGO 구호단체인 옥스팜(Oxfam)과 카톨릭국제개발조직(CAFOD)으로부터 후원금과 물품을 지원받아 소, 돼지, 닭을 키우기 위한 스코틀렌드식 농장을 지었으며, 아이들에게 우유 한 컵과 계란 하나를 주려는 목적으로 우유가공소까지 만드는 등 당시로는 30만 평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초현대식 농장을 일구어냈다.
무학농장을 개간할 무렵은 6.25 전란의 여파로 곳곳에 영양실조로 부황들린 사람들이 많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 무학농장의 돈사 모습
무학농장은 가난한 지역주민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희망의 일터가 되었고, 돌 하나라도 옮겨오는 등의 실질적인 근로를 제공할 때에만 품삯보다 더 많은 밀가루를 지급하여 자립과 자활 정신을 북돋우었다.
이러한 활동은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보다 5년 이상 앞서 사실상 우리나라 ‘농촌 지역 주민공동체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무학농장은 우리 현대사 최초의 농촌 가난 극복을 위한 ‘주민공동체 운동’이라는 큰 의미가 있었지만, 운영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하여 문을 닫게 된다. 우유를 생산하여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급하자 우유 판매에 위협을 느낀 우유업체들의 위협과 방해로 목장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학농장을 매각한 대금은 무학중학교를 개교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후일 무학고등학교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로써 이임춘 신부님의 뜻대로 가난을 극복하는 가장 궁극적인 방안이 이뤄졌다.
▲ 수지 선생님과 함께한 영남대 벚꽃 놀이
수지 선생님은 무학농장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는 너무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무학농장에서 일을 하는 주민들에게 품삯으로 돈 대신에 금액보다 더 많은 밀가루를 지급하였어요. 주민들은 그 밀가루를 다시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지요.
무학농장이 하양의 가난한 주민들을 먹고살게 해주고, 자녀들이 다니는 무학중학교를 위해 쓰이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느님께서 역사를 인도하신 일입니다.” - 천주교대구대교구 사회복지회 간행 ‘처음과 같이 이제와...’ 중에서
무학산의 문화적 가치
▲ 관봉에서 바라본 무학산
무학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하양은 ‘꽃재’로 불리기도 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 아름다운 언덕, 무학산에는 이타행의 거룩한 삶을 사신 분들의 아름다운 발자취와 향기가 남아 있다.
삼국통일 전쟁의 상처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민중의 한을 달래기 위해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며 박애의 무애행(無碍行)으로 우리 민족의 해원을 이룬 원효대사가 수도한 불굴사 석굴, 이임춘 신부님과 수지 선생님의 숭고한 삶이 녹아 있는 무학농장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꿈과 희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특히 무학농장은 옥스팜의 구호 지원이 크게 성공한 사례이고, 수지 선생님의 인생 스토리가 담겨 있어 세계적인 관광 콘텐츠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 대구가톨릭대학교의 돔형 스트로마톨라이트(찬연기념물 제512호)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는 대구카톨릭대 캠퍼스 한가운데에서 36억 년 전 원시의 바닷가에서 생명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거대한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발견되어 천연기념물 제512호로 지정됐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 제266호 경산상엿집
무학산 중턱에는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경산 상엿집’이 자리 잡아 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제266호)로 지정되어 생명 문화의 산실이 되고 있다.
바야흐로 무학산은 생명의 탄생과 박애의 삶과 돌아감이 시공을 초월하여 한자리에 모인 유일한 생명문화의 성지이다.
무학산과 무학농장을 꽃재로, 전 세계인들이 와서 생명존중 문화와 박애의 삶을 배우고 공부하는 테마파크로, 시민들이 일상의 휴식을 즐기는 휴심(休心)의 쉼터로 멋진 개발을 상상해 본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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