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실마을의 봄 풍경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한실마을에 봄이 오다
▲ 한실마을 가는 길에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
한실마을 가는 길에 봄꽃이 화사하다.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살구꽃, 연미색의 자두꽃이 무채색의 들판에 선연한 색상을 수놓는다. 하양 대가대 뒤쪽에서 조산천 상류 쪽으로 자동차로 십여 분 정도 올라가면 대곡1리 마을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대곡2리가 나온다. 마을은 길이 끝나는 곳에 새색시마냥 얌전히 앉아있다. 마을 입구 작은 동산에는 쉼터인 정자가 있고 개울 건너 마을회관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마을의 수호신인양 오래된 느티나무와 키가 늘씬한 소나무 몇 그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마을에서는 그곳을 ‘천왕당’이라 부른단다. 아마 ‘성황당’이 세월이 흐르면서 ‘천왕당’으로 변이된 듯싶다. 음력 정월 열나흩날 자정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동제를 지냈는데,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 경산시 하양읍 대곡리 한실마을
대곡2교 다리를 건너 볼록한 지형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산자락 경사진 언덕을 배경으로 자리한 전형적 산골마을이다. 첫 인상이 아담하고 정겹다. 행정상 마을 이름은 하양읍 대곡2리이나 하양사람들은 윗한실마을이라 부른다. 한자어나 우리말이나 번역하면 ‘큰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곱씹을수록 정겹다. 이 마을 처녀가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가면 택호가 한실댁이겠다. 마을 이름에는 역사와 지형 같은 스토리가 숨어있다. 마을 주변 산에서 흐르는 풍부한 수량을 바탕으로 중앙에는 집들이 자리하고, 양쪽 산자락에 계단식 논밭이 펼쳐진다. 마을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환성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만나 조산천을 이룬다.
본래 한실마을은 하양 허씨 집성촌이었다. 남쪽의 장군산을 넘으면 하양 허씨 세거지인 부호리이다. 대곡리는 팔공산 줄기에 연하여 있으며, 하양의 진산인 무학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마을 뒷산을 넘으면 환성사가 나온다. 대곡리 마을 왼쪽 계곡을 따라가면 대구 평광동으로 넘어가는 새미기재가 있다. 예전에는 평광동 주민들이 하양장을 보러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하양장에 소를 팔러온 소장수도 새미기재를 넘어 갔다. 긴 가뭄에도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의 버들가지에 새순이 돋아나고 생각나무에도 빵가루 같은 꽃이 핀다. 휴일이면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임도를 신나게 달리고 가벼운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도 보인다.
마을 곳곳에 전원주택들이 눈에 띈다. 외지인들이 탐낼만한 지형이다. 무엇보다 귀한 소나무가 많다. 산자락에 올라앉은 작은 마을은 풍광이 수려했다. 마을을 둘러보니 공장이나 축사가 없다. 경산에도 이런 청정마을이 있다니 신기하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삼 대째 살고 계신 허홍렬(87세) 어르신의 말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이 똘똘 뭉쳐 공장과 축사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단다. 한때 부동산 열풍으로 마을의 땅과 집이 외지인에게 많이 넘어갔다. 아직은 허씨들이 마을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래서 산촌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은 허씨 본토박이와 바깥에서 들어온 한 가구가 반반 정도란다.
한실마을 뒷산 트레킹 코스는 여러 갈래이다. 남쪽 환성사 쪽으로 치고 올라가거나, 평광동 넘어가는 새미기골으로 걷거나, 남쪽 장군산(이 마을 사람들은 장군배미라 부른다) 능선을 걸어도 좋다. 우리 일행은 왼쪽 계곡을 따라 새미기골 고개까지 걸었다. 경사도 완만하고 계곡을 끼고 걸으니 물소리도 들을 수 있다. 계곡 주변 에 연두색 갯버들이 눈에 띈다. 봄이 오면 개울가 갯버들에서 피는 솜털이 보송한 새순이 애벌레처럼 피어나곤 했었다. 밭둑에 핀 홍매와 청매에 눈이 부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봄날이 연출한 화사한 그림을 바라보는데 바람결에 고혹적인 매화향이 스쳐간다. 수채화 같은 풍경과 매화향이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자두밭에도 연미색 꽃눈이 막 터지는 중이다. 자두꽃이 활짝 피면 한실마을에도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2. 백곡서원(栢谷書院)과 한실마을 사람들
▲ 백곡서원
한실마을 아이들은 큰물이 지면 학교를 결석했다. 공부하다가도 비가 많이 내리면 선생님이 서둘러 아이들을 집으로 보냈다. 하굣길에 계곡물이 불어나면 비를 피해 무학산 자락을 걸어서 왔다. 시오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오갔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마을에 서당을 열고 훈장 선생을 초빙하여 아이들에게 한학 공부를 시켰다. 허홍렬 어르신 댁 마루에 주역, 풍수지리, 동의보감, 약초관련 책 등이 눈에 띈다. 심심할 때 보는 책이란다. 어르신도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부터 명심보감, 대학까지 한학의 교육과정을 배웠다. 이와 별도로 해방 후에는 신식교육도 받았다. 대곡리에서 하양초등학교, 하양중학교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마을 뒤쪽 자두밭 옆에 백곡서원이 있다. 앞뜰의 늘씬한 배롱나무와 뒤란의 대숲이 서원의 역사를 말하는 듯하다. 서원에 모신 희성당 허응길은 1584년(선조17년) 무과에 급제하여 현풍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양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방어에 공을 세웠다. 1974년에 하양 출신으로 왜란 때 공을 세운 의병장 8인을 기리는 ‘임진창의제공하양사적비(壬辰倡義諸公河陽事跡碑)’를 세웠는데, 희성당 허응길도 들어가 있다. 하양 허씨 문중이 낳은 허조 선생과 더불어 후손들이 기리는 인물이다. 유교적 문화유산의 상징인 서원이 마을에 있다는 것은 훌륭한 조상과 역사를 가진 마을이라는 징표가 아니겠는가.
대곡리 마을 뒷산을 두어 시간 걷고 내려오니 시장기가 돈다. 마을에서 유일한 식당 ‘한실정’에 가서 맛있다고 소문난 들깨 칼국수를 주문했다. 한실정 사장님은 이 마을로 시집온 며느리인데, 대구에서 살다가 3년 전에 귀촌했단다. 새집을 짓고 일 년도 못되어 시어른이 돌아가시자 할 수 없이 시댁에 눌러앉게 되었다. 음식 솜씨가 좋다는 소리를 듣던 터라 마당 넓은 집에서 식당을 차렸다. 차츰 입소문이 나고 점심시간이면 칼국수와 닭백숙을 먹으러 오는 손님이 많다. 정갈하고 고소한 들깨 칼국수는 이 집의 인기메뉴이다. 거실의 넓은 창문으로 마을과 산자락이 풍경화처럼 눈에 들어온다.
한실마을에 가면 인정이 넘치는 한 사람이 있다. 마을 뒷산 트레킹을 하고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그를 따라갔다. 나와 겨우 두 번째 만난 그녀는 스스럼없이 일행을 집으로 안내했다. 낮은 지붕과 돌담이 마을 풍경과 잘 어울린다. 튀지 않는 집은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집이 주인장을 닮았다. 장영남 씨는 13년 전에 한실마을에 들어와 시어른을 모시고 살고 있다. 남편은 진량공단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한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일 년여에 걸쳐 손수 황토방을 지었다. 황토벽돌로 벽을 쌓고 옛날 방식으로 구들을 깔고 장작을 땐다. 누구나 작은 방에서 차를 마시고 뜨뜻한 구들에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소원이었단다.
별채인 황토방은 그녀만의 공간이며, 지인들과 차를 마시는 객실이기도 하다. 토방에 앉으면 한실마을 앞산이 눈높이에 맞게 창문으로 들어온다. 나는 그 토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상상해보았다. 어느 겨울날 함박눈이 내리는 앞산 풍경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휘영청 보름달이 뜬 날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벗 삼아 차 한 잔 나누는 정경을 그려보았다. 작은 화병에 매화 한 가지 꽂아두면 더 좋겠다. 어쩌면 이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 낯선 이에게 기꺼이 작은 흙집과 차 한 잔을 내놓는 인정이 넘치는 장영남 씨가 있어 나는 자꾸만 한실마을에 가고 싶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공단을 조성한다고, 길을 낸다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마을을 밀어버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고 자랐고, 나와 동무들이 뛰어놀았던 그런 마을이 지상에서 하나, 둘 소멸된다. 마을은 공동체의 상징이자 개인에게는 존재의 근거지이다. 한실마을을 보자 흥분했던 이유도 내가 태어난 마을과 유사한 지형과 풍경을 지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실마을 뒷산에 올라갔다가 여유가 있거든 산 너머 환성사로 내려가도 괜찮다. 대웅전 마당에 서서 수월루가 연출하는 멋진 차경(借耕)을 보길 바란다. 지금 한실마을 뒷산은 회색에서 천연색으로 변신 중이다. 푸른 소나무와 버짐처럼 피는 산벚꽃과 선홍색 물감을 흩뿌린 듯한 진달래가 한창이다. 놋그릇처럼 묵직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나무들과 생강나무꽃 같은 순정함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한실마을이 있어서 참 좋다.
<글 / 이운경(이경희)>
<사진 / 무철 양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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