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 등 산 편/경산곡곡스토리텔링

경산곡곡 스토리텔링에 사진을 싣다 - 33(도천산)(경산인터넷뉴스)

무철 양재완 2022. 1. 26. 17:47

‘하늘에 이르는 산’ - 도천산(到天山)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1. 도천산(到天山)이란 이름

▲ 도천산 등산로

 모든 존재는 명명(命名)으로서 제 존재를 드러낸다. 풀꽃도 대지도 인간도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의미가 발생한다. 산도 마찬가지다. 도천산(到天山),  하늘에 이르는 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하늘에 이르는 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품고 갔다가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도천산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어지는데 주봉이 겨우 해발 261미터에 불과하다. 기러기가 함박산을 찾아 하늘로 날아갔다고 하여 도천산이라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늘에 닿을 수 없으니 기러기의 힘을 빌렸는지도 모른다. 동네 뒷산처럼 나지막한 도천산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 한장군의 전설을 담은 문화재 - 여원무

도천산은 자인면과 진량읍을 경계 짓는 산이며, ‘한장군 전설의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왜군이 쳐들어와 도천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한장군은 오누이와 여인들을 시켜 버들못가에서 여원무를 추라고 지시한다. 왜적이 화려한 여인들의 춤에 빠진 틈을 타서 한장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버들못은 자인공단을 조성하면서 메워버렸지만, 도천산은 건재하다. 봄이 오면 산자락의 복숭아밭에는 복사꽃이 만발하리라. 해마다 피는 도천산의 진달래와 복사꽃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애절한 사연인지도 모른다.


도천산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레이다. 트레킹을 하려면 대경대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일행은 자인 공단으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도천산으로 향했다. 임도 양쪽으로 참나무와 무덤이 즐비하다. 칠부능선 쯤에 다다르니 교회 공동묘지도 보인다. 더 올라가니 김씨 문중의 묘와 도천산을 예찬한 시비(詩碑)도 있다. 풍수지리에 근거한 이유인지는 모르나 도천산은 산자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안식처였다. 도천산이란 지명과 무덤과 기러기를 연결하니 고구려 고분벽화가 떠오른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새를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고 믿었다. 하늘에 이르는 산, 도천산에 묻힌 이들의 영혼은 기러기를 타고 무사히 천상의 세계로 올라갔을 것이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진량 사람들이 자인장을 보려면 도천산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퉁이를 이고지고 도천산 산길을 걸어갔을 것이고, 내 아버지도 이 길을 따라 자인중학교로 등하교를 했을 것이다. 그 옛길을 더듬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와 하늘나라로 이적한지 삼십 년이 넘은 아버지의 혼령을 만날 수 있으려나. 그 산길은 잡초가 우거지고 사람도 만날 수 없다. 도천산은 자인과 진량에 살았던 지역민들의 애환과 삶의 발자국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2. 도천산 아래 절집, 인흥사

▲ 인흥사 대웅전

기억이란 집요하다. 시간이 지나 흐려지고 지워지는 기억도 있다.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기 마련이다. 내게 자인 일언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연하게 떠오르는 기억이다. 친정 할머니가 석가탄신일에 즐겨 찾던 절이 일언절이다. ‘일언절이라는 세 음절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자 오랜 기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친구도 유년기에 할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갔었고, 며칠씩 절에서 머무르기도 했단다. 백수를 누리신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 곳이라 요즘도 자주 일언절에 간다고 한다. 자인에는 불당고개 근처의 제석사와 일언리의 인흥사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도천산에서 내려와 자인면 계림로로 들어서면 평지에 마을이 나타난다. 자인면 일언리 29번지에 위치한 인흥사는 은해사의 말사로서 대웅전과 요사채만 갖춘 단출한 절이다.


우리 일행의 말소리를 듣고 요사채에서 스님이 나오신다. 인사를 나누자 차 한 잔 대접하겠다며 일행을 요사채로 안내하신다. 원래 일언리에 계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동네 이름도 절골이라 불렀단다. 어느 시절 절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 동네 출신의 스님이 60여 년 전에 불심이 발원하여 대웅전을 짓고 절을 세웠다. 절을 지을 때 석등이 나왔는데, 그 석등은 지금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석등이 나왔으니 절터가 틀림없다. 계림사라는 지명에 비추어보면 예전에는 그 자리에 숲이 울창했을지도 모른다.

▲ 인흥사 석가모니불

도륜 스님과 차담을 나누면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농부가 밭일을 하다가 석조 부처님을 찾았고, 그 부처님을 마을 어딘가에 두었는데 훼손이 심했다. 큰스님이 불상을 수리하고 개금을 하여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인흥사 대웅전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다. 규모나 조각기법으로 보아 야외에 모신 불상으로 추측한다. 짐작컨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을 허물고 부처님과 석등을 땅에 묻지 않았을까. 인흥사를 재건한 노스님은 육칠년 전에 열반하시고, 도륜 스님이 뒤를 이어 혼자 절을 지키고 계신다.

절터의 규모로 보아 한때는 꽤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그야말로 절집처럼 고요하다. 마을 어른들이 가끔 들러 놀이삼아 두는 바둑판이 보인다. 대웅전 앞 화단에 스님이 여행 가서 가져온 돌조각이 정겹다.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는 잊힌다. 계림사와 인흥사도 분명 지상에 존재했으나 기록하지 않아서 역사를 증명할 수 없다. 유물과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는 민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어느 스님의 지극한 불심으로 지상에서 사라졌던 계림사는 인흥사로 환생했다.

3. 안촌리 소방못과 김부자집

▲ 도천산 아래에 위치한 소방못 '효막지'

자인에서 도천산을 넘어가면 진량읍 안촌리가 나온다. 고속전철이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바람에 예전 마을 광경이 사라졌다. 마을의 20호가 고속전철 부지로 들어가고, 나머지 가구들은 마을 입구로 이주를 했다. 마을교회와 경로당 등 몇 가구만 옛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도천산이 병풍처럼 두른 언덕에 자리한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도천산 아래에는 소방못이 있다. 소방못 주변은 최근 시에서 말끔하게 단장을 했다. 낚시꾼들에게 잘 알려진 산골 저수지로 복사꽃이 피는 봄날에 저수지주변을 트레킹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소방못의 별칭은 효막지(孝幕池)이다. 효자 막지가 살던 터에 물을 가두고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자리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던 데서 유래한 이름인 듯싶다. 못 주변은 복숭아밭과 자두밭 천지다. 소방못을 지나 골짜기 자두밭에 거름을 내고 전지를 하는 농부를 만났다. 오지랖 넓은 친구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보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잘 아는 안촌리 사람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주고받는 말 속에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골짜기에는 농막과 전원주택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다.


도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소방못으로 흘러들어가는 골짜기를 예전에는 절골이라 불렀다. 지명으로 보아 절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골짜기를 놀이터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깨진 기와조각을 심심찮게 보았다고 한다. 절골에는 옹달샘도 있었다.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그 샘물은 마르지 않았고, 속초리와 안촌리 주민들에게 생명수가 되어주었다. 지금은 수풀이 우거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 도천산 능성 정자

안촌리에는 김 부자집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안촌리 큰집에 가서 본 붉은 벽돌의 높은 담장과 담장 위 굴뚝은 선연하게 남아 있다. 초가집이 대부분인 산골 마을에 우뚝 솟은 붉은 벽돌집은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글 천 석, 살림 천 석, 자식 천 석이라는 김 부자집도 고속전철 부지로 들어가 지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그 후손들은 마을에 새로 집을 지어 분가해서 살고 있다. 취재 차 김 부자집 후손 어른을 만났다. 여든여덟의 연세에도 또렷한 기억력으로 한 집안의 흥망성쇠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낙천적 성격의 김능태 씨(진량읍 안촌리, 88)는 풍수지리와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 이야기를 유창하게 말씀하셨다.

개화기 무렵 소금과 삼베 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 부자집은 안동의 도산서원 원장을 지낼 정도였다. 임진왜란 후 전란의 화를 피해 안촌리로 입향한 김 부자집은 한때 300여 평 대지에 기와집이 즐비했다. 자손이 결혼해도 바로 분가시키지 않고 한집에서 살았다. 경산, 영천, 청도까지 땅을 사들여 한해 거두는 나락이 천석으로 부를 쌓았다. 살림이 흥할 때는 남산 경동 김씨 집안의 사랑채를 당시 논 50마지기 값을 치르고 사와 이건했다. 그러다가 살림이 기울어 그 건축물을 경주 양동마을 월성 손씨 대문중에 팔았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을 비껴갈 수는 없었는지 1984년 화재로 남은 기와집도 불타버렸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서책과 고가구 등도 재로 사라져 버렸다. 지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 도천산 시비

도천산은 이름 없는 나직한 산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서 보듯 옛 사람들의 염원이 서린 공간이다. 생이란 고독의 시간을 견디고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일이다. 천상에서라도 신선처럼 살기를 바랐던 인간의 소망은 지금도 유효하다. 도천산 자락에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던 것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무릇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생노병사의 운명을 안고 살아간다. 도천산과 인흥사, 소방못과 절골을 둘러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복사꽃이 화사한 봄날에 고향 친구들과 도천산 자락 둘레길을 걷기로 약속했다.


< / 이운경(이경희)>
<사진 / 무철 양재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