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 길을 걷다]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
- 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입력 2024-12-27 | 수정 2024-12-27 08:13 | 발행일 2024-12-27 제15면
선교의 자취가 완연한 나바위성당 선교의 나이테가 동심원을 그린다
날씨는 쌀쌀했고 오후였다. 찬바람이 불었지만 도리어 감미로웠다. 맑은 하늘엔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야트막한 산은 너른 들판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조선 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소박하고 수려한 이산에 화산(華山), 즉 꽃 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바위성당은 화산 자락에 있었다. 서(西)로 기울어진 햇빛은 그래도 따스했고 마음은 시나브로 기쁨으로 가득 찼다. 신앙의 영적 풍상이 얼기설기 배어 있는 본당의 첨탑과 고딕식 건물이 눈을 치뜨게 했다. 우리나라 3대 성당 서울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전주 전동성당에 버금가는 선교의 나이테가 동심원을 그리는 나바위성당. 거기로 걸어가며 우측을 흘깃 보니 사각 건물 지붕에 꼬리가 무성한 장닭의 조형물이 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거기로 향한다. '나바위 치유의 경당'이다.
경당 건물 입구에 포승줄에 묶인 예수 성상이 있다. 이 성상은 예수가 로마군에게 붙잡혀 영육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한 에케 호모(Ecce Homo) 상이다. 3년의 공생애 시간에 숱한 기적과 사랑으로 하느님이 계심을 알린 예수님. 하느님에게 몸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아담이라면 영혼을 받은 최초의 사람은 예수였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받은 수난사에 닭과 에케 호모 상이 나온다. 이것을 복음을 통해 따라가 보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태복음 26:33-35) 그리고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태복음 26:74-75) 닭울음을 듣고 스승인 예수를 부인하여 배신한 베드로가 회개의 통곡을 했다. 지금 치유의 경당 지붕 위에도 그날의 새벽닭이 울고 있다. 우리도 이제 회개의 통곡을 하고 영혼을 치유해야 하지 않겠는가.
25세 순교 조선인 사제 첫발 디딘 곳
한옥건물에 고딕식 벽돌종탑이 눈길
동서양 건축 조화 국가 사적으로 지정
박해의 슬픈 역사 떠올리며 깊은 여운
또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 위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요한복음 19:1-5) 이 상은 요한복음에서 빌라도가 저희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하는 그 예수를 조각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전도를 죄로 삼아 십자가형에 처하자는 유대인에게 소리쳤던 빌라도의 이 말은 지금까지 인류에게 영적 치유의 메시지가 되어 왔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에게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 경멸하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에게 애면글면 기도했다. 1956년 건축된 이 건물은 당시 진료소나 강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역 사람들에게 치유, 사랑, 위안을 주었던 장소이다.
전북의 대표 성당인 나바위성당. 1882년 나바위 공소로 시작됐다.
나바위성당 내 치유의 경당
나바위성당 본당으로 향한다. 사목 표어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였고 그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정도로 어림해 본다. 나바위성당은 조선인으로서 최초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중국에서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1845년 10월12일 오후 8시 금강 줄기인 황산 나루터(현 나바위 성지)에 첫발을 디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성당이다. 나바위성당은 1882년 나바위 공소를 시작으로, 1897년 본당을 설립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모렐 신부가 1906년 신축 공사를 시작 1907년에 준공했다. 1916년 흙벽을 서양식 벽돌로 바꾸고, 용마루 부근에 있던 종탑을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종탑을 세웠다. 그리고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고쳤다. 서양식 건축 양식과 한국의 목조 건축 기법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근대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국가 사적 제328호로 지정됐다.
본당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군 솔뫼 순교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학 탄압으로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천주교를 믿고 공부했다. 당시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는 공소가 생겨나고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신앙이 영글지 못했다. 이러할 때 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 후 천주교 전도를 위해 배를 타고 귀국했으나 불과 13개월 동안 사목 생활을 하다가 붙잡혀 국난을 받고, 1846년(헌종 12) 9월16일 병오박해 때 25세 나이로 한성부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였다. 천주를 위해 죽고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된다고 하는 김대건 신부의 유언은 종탑의 종소리가 되어 공명하고 긴 여운으로 메아리쳤다.
본당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군 솔뫼 순교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학 탄압으로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천주교를 믿고 공부했다. 당시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는 공소가 생겨나고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신앙이 영글지 못했다. 이러할 때 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 후 천주교 전도를 위해 배를 타고 귀국했으나 불과 13개월 동안 사목 생활을 하다가 붙잡혀 국난을 받고, 1846년(헌종 12) 9월16일 병오박해 때 25세 나이로 한성부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였다. 천주를 위해 죽고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된다고 하는 김대건 신부의 유언은 종탑의 종소리가 되어 공명하고 긴 여운으로 메아리쳤다.
나바위성당이 위치한 화산 자락에서 바라본 들녘과 마을
이윽고 화산 정상 망금정에 도착한다. 화산은 평야에 있어 사방으로 뷰가 터지고 그지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망금정이란 비단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본다는 뜻이라고 하니 가히 알조가 아닌가. 망금정에 앉아 쉬는데 얼마 전 읽은 신문 기사가 기억났다. 가난한 한국과 결혼한 벽안의 천사 영국인 처녀 메리 영거(한국명 양수지). 향년 88세로 선종했다. 메리 영거는 영국에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 교회사를 듣고, 박해와 순교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에 한국에 갈 것을 곰비임비 결심했다. 1959년 12월 영국인 처녀 23세 메리 영거는 화물선에 중고 피아노 7대(대구 효성여대에 피아노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를 싣고 5주간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 후 양수지(메리 영거 여사의 한국식 개명) 여사는 대구에 정착해 효성여대 교수로 지내며 구두닦이 소년, 갈 곳 없는 여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 출신 의사와 약혼한 상태였지만 혼인 성소를 포기하고 약혼자에게 사과 편지와 함께 봉투에 약혼반지를 넣어 우편으로 보냈다. 1960년 대구 가톨릭 근로 소년원에서 봉사하고, 1962년 대구 삼덕동에 가톨릭 푸름터를 설립했다. 이후 선종하실 때까지 대구 지역 사회 복지에 초석을 다졌다. 그분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정녕 가장 낮은 곳에서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생전에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때쯤 나는 어떤 슬픔에 젖었고 슬그머니 손수건을 꺼내 눈두둑을 훔쳤다.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무철 양재완 여행사진 작가
☞문의 : 익산 나바위성당 (063)861-9210
☞주소 : 전북 익산 망성면 나바위 1길 146
☞트레킹 코스 : 주차장-치유의 경당-본당-김대건 신부 순교탑-망금정
☞인근 볼거리 : 용안생태습지, 두동교회, 웅포 관광지, 익산 미륵사지, 익산 왕궁리 유적, 금마 관광지, 이병기 생가, 보석 박물관, 용안향교, 숭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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