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철 양재완 2014. 10. 12. 18:15

 

 

태사묘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재사이다.

1481년(성종 2)에 관찰사 김자행이 묘우를 세우는 터전을 마련했고 이어서 1540년(中宗 35)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 위치에 묘를 건립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는 규모를

확대 개건하고 그 이름을 비로소 태사묘(太師廟)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혹은 증축하고 수리하며 제도를 보완하여 왔으나 6·25동란 중에 전면 소실된 것을

1952년 재건에 착수, 1958년 9월에 완공되어 현재는 보물각과 숭보당, 동서재, 경모루, 안묘, 차전각 등이 있다.

묘정에는 삼공신비가 세워져 있다. 보물각내에는 3공신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안동시청)

 

 

 

 

 

 

경모루 (당 회의와 제향시 북을 치는 곳)

 

 

하마비

 

 

숭보당 (당 회의와 참재원들이 숙식 하는 곳)

 

 

서 재

 

 

동 재

 

 

 

 

 

전사청 (제수 봉안 하는 곳)

 

 

안묘당 (안중할머니와 안금이 위패 봉안)

 

 

삼태사 묘정비

 

 

김. 권. 장태사의 묘정비

 

 

태사묘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사 봉향 하는 곳)

 

 

태사묘

 

 

태사묘 입구

 

 

태사묘 입구

 

 

보물각 (보물 451호와 삼태사 유물, 공민왕 하사품 등이 있음)

 

 

보물각과 주사 (관리인 주거 하는 곳)

 

 

신라말 귀족의 왕위 쟁탈로 왕권(王權)이 약화되자 9세기에 이르러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은

신라의 영토를 쟁취(爭取)하기 시작했다. 후백제 견훤(甄萱)은 신라의 여러 성을 쟁취(爭取)하고 929년 고창군(古昌郡)을 침략하려고 석산(와룡면서지, 절골 앞산)에 진을 치고 927년 동수(桐藪:팔공산)싸움에서 크게 패한 고려 왕건(王建)은 군사를 정비하여 병산(甁山:와룡면 서지. 절골 뒷산)에 대치하니 그 거리가 500보 정도였다.이 때는 삼태사(三太師)의 향배(向背)에 따라 승패(勝敗)가 좌우되는 시점인데 태사공(太師公)들은 왕건(王建)을 돕기로 협의하고 930년 고려를 도와 협공(挾攻)하자 견훤군(甄萱軍)은 군사 8000여명을 잃은 후 패하고 도주하였다.
이때 안중(安中)할머니가 몰래 고삼술을 빚어 견훤(甄萱)의 군사들에게 권하여 만취(滿醉)케 하고

삼공신군(三功臣軍)에 알려 급습(急襲)으로 승리(勝利) 할 수 있게 하였다는 설(說)이 전(傳)하고 있다

병산대첩(甁山大捷)에서 대승하자 인근 30여 고을은 물론 신라 동북쪽 여러 성주(城主)가 고려에 귀부(歸附)하였으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은 935년에 고려에 투항(投降)하고 후백제는 부자간(父子間) 왕권(王權) 싸움으로 936년에 고려에 멸망하니 후삼국은 통일(統一)되었다.

 - 안동태사묘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