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여행) - 하회마을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안동하회마을 홈페이지에서 -
하회마을 입구의 결실을 앞 둔 푸르름
하회마을
하회마을
하동고택 (중요민속자료 제 177호)
하회마을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하동고택이라 함
하동고택
특이한 점은 대문채는 초가집이지만 사랑채와 안채 등은 기와집인데, 이 집의 창건자가 후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차례 융성하면
한 차례는 쇠락하므로 욕심을 내어 전부를 채우려 말고, 부족한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회마을
염행당 (중요민속자료 제 90호)
염행당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의 남쪽을 대표하는 남촌댁(당호 염행당)은 정종21년 지은 99칸의 건물로서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함
염행당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염행당
건물의 특징은 문간채는 솟을 대문을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들연기를 하나의 큰 굴뚝으로
뽑아낼 정도로 사대부집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건물이었다
염행당
염행당
염행당
석고고택
조선 후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석고 류도휘의 고택이다. (류도휘의 호를 딴 이름)
석고고택
안채는 서향이고 사랑채는 정남향 구조이다
하회마을
화경당 (중요민속자료 제 84호)
화경당의 뜻은 화(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敬)으로 임금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화경당 (북촌)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하회마을
하회마을
양진당 (보물 제 306호)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양진당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양진당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선생을 지칭한다.
충효당 (보물 제 414호)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충효당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이다
충효당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충효당
,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작천고택 (중요민속자료 제 87호)
류시주가옥은 현재 집주인 이름을 딴 것이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공의 호를 따「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려왔다. 건축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